[정진경 칼럼] 이웃과의 즐거운 저녁 한 때
[정진경 칼럼] 이웃과의 즐거운 저녁 한 때
  •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 승인 2021.11.13 08:22
  • 수정 2021-11-13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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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사회심리학자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화창한 초가을 저녁 무렵, 해가 내려가며 분홍 노을이 일고 바람이 솔솔 불었다. 제주도 친구가 귤을 보내 주어서, 싱싱할 때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려고 남편과 함께 들고 나섰다.

바로 이웃집 할머니에게 먼저 갔다. 60대 후반 내 또래니 노인들만 사는 이 시골 동네에서는 아주 젊은 축이다. 저녁을 일찍 먹고 동네 길을 내다보고 있었던지 우리 기척을 보고 얼른 나왔다. 귤을 건네며 못 본 동안 잘 지냈냐고 물었더니 알레르기로 고생했다고 한다. 나도 몇 주간 병이 나서 고생했던지라 서로 병치레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농사 가을걷이, 더위가 물러가고 좋아진 날씨 등으로 이어졌다. 남편이 건너편 집 할아버지에게 귤 전하고 돌아올 때까지 한껏 수다를 떨고 있는데, 길 아래쪽 이층집 할머니가 우리가 있는 걸 봤는지 나오셨다.

이야기판이 커지며 끝날 줄을 모르는데 차 한 대가 우리 옆에 섰다. 포도밭을 하는 이웃 부부가 차 트렁크에 포도 상자를 잔뜩 싣고 동네 사람들에게 배달하는 중이었다. 요즘 그 집 할머니가 몸이 아파 엊그제 포도 수확을 할 때 일을 할 수 없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여럿 가서 도와줬다고 한다. 그날 일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포도를 돌리는 거였다.

곁에 서 있다가 덩달아 우리도 한 상자를 받았다. 일을 도와드리지도 못했는데 웬 포도냐고 사양했더니, 마침 거기 서 있어 운이 좋은 거니 그냥 받으란다. 포도알이 몇 개씩 터져서 어차피 못 파는 것이니 걱정 말고 얼른얼른 먹으라면서.

시끌벅적한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건너편 집 할아버지도 슬리퍼 끌고 나오신다. 이웃들의 수다는 끊이질 않다가, 해가 넘어가고 모기가 출몰해서야 다들 집으로 향했다.

이 수다에 한몫 한 옆집 할머니는 청각장애가 있다. 소리를 못 듣고 말씨가 약간 어눌해도 이 동네에서는 그게 별 문제가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알아들으며 같이 지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얼굴 보고 입모양 크게 천천히, 필요에 따라 반복해서 말하면 웬만한 얘기는 다 통한다.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는 동네, 이 건 참 좋은 동네다. 사람 사는 동네가 모름지기 이래야 하지 않나.

몇 해 전 우리가 처음 이사 와 서로 낯설 때는 좀 피하는 듯했는데, 지금은 멀리서도 손짓해 부르는 사이가 됐다. 자기가 나보다 한두 살 아래라고 심심하면 나보고 언니라 한다. 둘 다 흰머린데 오늘은 불쑥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니, 머리 이~뻐!” 해서 허물없음을 확인시켜준다. 콩 씨앗, 배추 모종, 우거지, 맷돌호박 등 내가 주로 뭐든지 얻어 오는 사이이기도 하다. 한쪽은 농사의 달인이고 한쪽은 왕초보니 그럴 수밖에. 그 집 수세미 농사가 잘 되었기에 내년에 심을 수세미 씨도 부탁해 놓았다.

수십 년간 아파트에 살다 시골 동네에 와보니 새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이 허물없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인상 깊다. 그러다 보니 오늘 같은 즐거운 저녁 한 때도 생기는 것이다. 기운이 없어 맨날 집에 들어앉아 있는 나 같은 사람도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들 반겨준다. 남편 혼자 산책을 나가면 이웃 할머니가 “색시는?” 하고 묻는다. “색시”라... 허허.

어느 건축가에게 들었는데, 단층이나 이층집에 사는 사람이 고층건물에 사는 사람보다 친구의 수가 세 배라고 한다. 아파트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반이 넘는데 집은 쉽게 바꿀 수도 없으니 어쩌나. 여기에 와서 살아보니 아파트에서도 어떻게든 동네 사람들과 이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낼지 묘안을 내 볼 필요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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