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여성학 태동·발전 이끈 여성학자
삼성행복대상 여성선도상 수상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홍수형 기자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홍수형 기자

장필화(70)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이 지난 8일 삼성행복대상 여성선도상을 수상했다. “한국 여성학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심사평이 “잔잔한 마음의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퍼지는 것 같다”고 했다. “여성학에 초점을 맞춘 이번 상은 고마우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와요. 이번 기회에 여성학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에 기쁘고요. 한국 여성학을 키워 온 모든 여성학자들과 함께 받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장필화. 이 이름을 빼고 한국의 여성학을 설명할 순 없다. 1984년 아시아에서 처음 생긴 이화여대 여성학과의 첫 전임교수로 부임해 30년 넘게 강단에 섰다. “여성학은 인간학입니다.” 그는 30년간 학생들에게 여성학을 이렇게 소개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여성학을 조금 달리 정의한다. “여성뿐 아니라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라고. 인간 중심주의인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명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학문이 여성학이라는 설명이다. “페미니즘 대신 휴머니즘‧패밀리즘을 지향하겠다”, “페미니즘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대선 판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다.

-지난 5년간 페미니즘 대중화라 일컬을 만큼 페미니즘, 여성학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지난 5년을 그동안 대중화와 거리를 둔 여성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강남역 사건’으로 거리로 나온 수많은 여성들로 인해 페미니즘이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즘 1세대’라고 지칭했다. 사실 당황스러웠다. 길게는 50년간 고군분투하며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운동을 하며 법을 제정하고 수차례 개정해왔는데, 2030 여성들이 스스로를 ‘1세대’라고 지칭하니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그동안 윗세대가 소수의 협동으로 뜻을 모아 해왔다면, 지금은 다수의 여성들이 새로운 형태로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더 많은 다양함을 요구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들에겐 당연한 것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보다 눈앞에 놓인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도 이해했다. 일종의 반성도 했다. 역사의식을 가지려면 많은 것이 기록돼야 하고, 기록된 것을 시대에 맞게 확산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2016년 정년퇴임을 하며 “30년 동안 여성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서론’ 쓰는 여자로 살았다”며 앞으로는 생명과 사회, 평화를 위한 여성학 연구에 집중하겠다고 했는데.

“평화나 생태는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대상의 의미는 아니다. 평화라는 상태가 무엇인지 체험하고 수행하겠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생태라는 말도 어떤 형태나 의미로 내게 오는 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사회 구조와 제도의 변화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는 ‘한 사람의 변화가 그 출발이다’라는 점에 좀 더 천착해 깊이 있게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다. 평화와 생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생태적 사유와 그것들이 어떻게 맞닿는지, 과연 생태적 사유는 실제로 어떻게 경험하고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를 겪으며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생태적 사유를 체감하게 됐다.

“한국여성재단에서 일을 시작한 시기가 코로나가 일상이 된 시기와 일치하면서 타격을 받았다. 여성재단 업무가 대면모임을 하며 기부에 대해 의논하고 기부활동을 하는 것인데, 대면모임이 전면 차단되면서 대안이 없어 걱정이 많았다. 줌 회의나 기존 시스템의 디지털화가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대면회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기업들이 이미 비대면에 적응하면서 굉장히 많은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노동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여론의 저항 없이 조용히 구조조정을 하고, 그것이 대기업의 이익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로 인해 노동자들이 무기력해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일련의 과정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디지털화나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과학기술 영역에 여성들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개별 여성단체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여성단체가 결집할 수 있도록 여성재단과 여성신문 등이 구심점이 되는 것도 필요하다.”

-‘단계적 일상 회복’이 시작됐다. 코로나 이후의 사회는 어떻게 재편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코로나19 초기엔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의 박쥐에서 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전염됐다는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인간이 생태계에 침범해 이런 문제에 봉착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해 무분별한 개발을 자제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지금 언론은 백신, 치료제 개발로만 가득하다. 문제의식을 기후위기나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까지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미미한 이 상황이 매우 유감스럽다. 하나의 중요한 문명사적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과학기술을 통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논조도 자리 잡고 있다. 개개인 모두가 변화하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에 비중을 두고 그 사례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코로나 이후 세상의 재편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 삶의 방식을 생태계에 무분별하게 침범하지 않는, 자연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자연을 짓밟았다는 생각을 갖고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대선 국면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일까.

“최근 기업에선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강조하는데 정치 영역에선 ESG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독일 녹색당은 정치적 영향력이 큰데, 한국에선 언제쯤 녹색당이 그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 여성들을 어떻게 결집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꼽히면서도 왜 우리는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20대 대선을 앞둔 지금까지 대선판에서 경제성장이 아닌 다른 이슈가 주요 아젠다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사인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20대 남성은 경제에 관심이 많은 반면, 20대 여성은 환경에 더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가능한 미래에 관심이 높은 20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더 많은 정치인들이 필요하다. 최근 청년여성 국회의원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더 많은 정치인들이 20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포용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이들이 실의에 빠지지 않고 성장하며 사회적인 힘을 만들 수 있도록 결합해 힘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결집과 연대가 중요하지만, 최근 세대‧성별 대립은 심화되고 여성 또는 남성 내부에서도 선 긋기를 하지 않나.

“남녀노소를 결집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위기의식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안에서의 대립이라는 것은 싸움을 안에서 해도 괜찮다는 안일한 인식 때문일 수도 있다. 보다 큰 투쟁의 대상이 앞에 놓이면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그 위기의식은 우리사회의 가장 구조적인 모순을 일으키는 분단 상황이기도 하고, 기후변화와 재난이기도 하다. 생존 문제 앞에서 안에서 계속 싸움해야 하는가라는 의식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코로나가 일조할 수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나 자연재해가 사실은 인위적인 재해이며 극복하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깊이 확산될 수 있다면 결집할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이기면 나는 진다’는 경제 논리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윈윈’할 수 있다‘는 새로운 존재 방식, 관계 방식을 만들어내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사실상 경계 짓기라고 할 수 있는 페미니즘 내부의 논쟁은 20대와 4050대 사이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다. 여기서 이른바 ‘파이’의 논리도 나온다. 그런데 더 윗세대인 6070대와 2030대는 호혜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한다. ‘선배가 우리를 지원하는구나’라는 것을 느끼면서 서로 ‘윈윈’, 상생, 호혜적 관계가 될 수 있는 경험이 늘어나면 문제는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2015년 5월 24일 이화여대 창립 125주년 기념 초청 토론회 참석차 이화여대를 방문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왼쪽부터) 행사를 주관한 장필화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 정현경 유니온신학대 교수, 스타이넘, 역시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에이미 리처드. ⓒ여성신문
지난 2015년 5월 24일 이화여대 창립 125주년 기념 초청 토론회 참석차 이화여대를 방문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왼쪽부터) 행사를 주관한 장필화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 정현경 유니온신학대 교수, 스타이넘, 역시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에이미 리처드. ⓒ여성신문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1974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여성학과 초대교수로 부임한 이래 지난 37년간 한국과 아시아 여성학 발전에 기여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의 첫 전임교수로서 30년 넘게 여성학을 가르치며 석사 300명, 박사 40명을 배출했다.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민간위원, 2000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여성자문기구 초대 의장으로 활동하며 여성정책을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지난해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잠재력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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