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뉴시스‧여성신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뉴시스‧여성신문

오래전 내 페이스북 담벼락에 욕설 댓글이 많이 달리던 때가 있었다. 내 글을 공유해가면서 거기다가 욕설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빠’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행태였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욕설들을 캡처하고 그들의 신상정보를 가능한데까지 확인하고서는 댓글과 메시지들을 보냈다. “오늘밤 12시까지 사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 경찰서에 고소장 제출합니다.” 그랬더니 언제 욕설을 했냐는 듯이 거의 빌다시피 하는 내용의 답장들이 순식간에 왔다. 그들은 불퇴전의 신념을 가진 투사가 아니라 그저 겁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겁도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그토록 거칠어지는 것일까? 이 질문은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지라는 인간관과 관련된 문제인지라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정치는 사람을 거칠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정치의 모순이며 딜레마다. 본래 정치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조정하고 다른 의견들 사이의 합의를 모색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정치 때문에 서로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반목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정치가 오히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대선이 돌아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평하듯이, 이번 대선은 최선의 인물을 선택하기 보다는 차선, 그것도 아니면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선거로 가고 있다. 그만큼 당당하게 지지할 후보를 찾기는 쉽지 않고, 저마다의 판단에서 어떻게든 막아야 할 후보만 보이는 선거가 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누구를 지지하는 투표라기 보다는, 누구를 반대하기 위한 ‘반대투표’의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벌써부터 SNS 공간들에서는 자신이 싫어하는 후보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차고 넘친다. 특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공방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진영 간 대결구도가 낳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물론 누구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우리 시민들의 자유로운 권리이며, 후보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나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행위이다. 문제는 반대하는 방법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원색적인 비방과 감정적인 언어의 배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향유해야 할 정치적 권리와는 거리가 멀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세계사랑(Amor mundi)’ 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삶’을 살자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던 정치적 삶은 내면의 정신적 사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지, 정신적 삶을 배제한 정치적 삶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사막으로 만들 뿐이다. 우리의 정치적 활동이 자기 내면을 가꾸는 정신적 삶에 기반하지 못할 경우, 정치가 갖던 본래의 의미는 상실되고 오직 증오와 적대의 감정만이 남기 쉽다. 그때 개인은 피폐해지고 심성마저 파괴되고 만다. 그런 정치로는 세상을 구할 수도 없고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다.

가을이 다시 지나가고 있다.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단풍길을 걸으며, 자연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인간들끼리만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정치는 늦가을의 고즈넉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플라톤이 원했던 ‘철인왕’(哲人王)이나 니체가 기다렸던 ‘초인’(超人)이 국가를 통치한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결국 우리들의 문제이다. 상대를 욕하기에 몰두하다가 본래 내 모습을 잃지 않도록, 그래도 나의 품격을 지키면서 반대하는 방법은 없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이 가을의 아름다움 앞에서 부끄럽지는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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