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되어있다. ⓒ홍수형 기자
10월29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분향소. ⓒ홍수형 기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장례식장에 모인 가족들은 옷을 갈아입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나는 화장실을 오가는 길목에서 장례식장 옆에 있는 근조화환을 보며 이게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얘기하는 대화를 들었고, 나 역시 의식하기 시작했다. 근조화환은 냉정하게도 죽은 이와 그의 가족의 사회적 계급과 명예를 설명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장을 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살던 동네로 왔을 때였다. 장례가 익숙하지 않았던 가족들을 챙겼던 건 이장을 여러 번 집도했던 분들이었다. 그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 거 좀 울어보세요. 여자 곡소리가 나야 편히 보내드릴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여성들은 조금씩 울기 시작했고 ‘모난’ 나는 그 말에 절대 울지 않으려 애썼다. 장례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 곡소리라니.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이 무례하게만 다가왔다. 이런 모습을 보고 친척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며 학습해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결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로서, 그리고 계급과 명예를 드러내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앞선 상황은 누군가를 추모하는 그 시간과 감정이 진공상태로서 남아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과 장례 앞에 그의 생을 평가하고, 최근 세상을 떠난 노태우의 죽음, 그리고 국가장에 분노한 것일 테다.

많은 이들이 노태우에 대한 국가장을 결정한 문재인 정부에 분노를 표출했다. 그 상황을 보며 나 역시도 화가 났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말을 하는 일부의 사람들을 보며 온몸이 아팠다.

그들은 박원순의 장례 앞에 공과 사는 따로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었다. 12·12 쿠데타의 주범이자 오월 항쟁을 피로 진압하며 학살했던 행적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한편 위력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정책적 업적을 운운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었다. 나는 허탈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더욱 조밀한 연대의 결을 만들기 위해 지금 마주한 가부장적인 모순과 성차별적인 지형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박원순의 장례식장을 찾았던 정치인들은 당시 ‘순수한 추모’를 이야기했었다. 추모하고픈 마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명백히 말하고 싶다. ‘순수한 추모’를 말한다는 건 본인이 어떠한 위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
조혜민 정의당 전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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