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정은미 명지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화가)
어머니 오수항 씨

1992년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 유학시절 엄마와 함께. ⓒ정은미
1992년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 유학시절 엄마와 함께. ⓒ정은미

엄마 무서워 시작한 공부

내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도 난 가끔 엄마한테 혼나는 꿈을 꾼다. ‘이 성적으로 대학 가겠니!’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방과 후 엄마가 완벽하게 세팅한 과외와 화실로 일주일 내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내 학창시절은 ‘SKY 캐슬’ 70년대 버전, 엄마는 소위 말하는 ‘돼지엄마’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내 의지로 공부했다기보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성적이 올라서 기쁘기보다는 엄마한테 혼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좀 어리숙한 아이였다.

엄마의 극성 교육열 덕분에 여차여차하여 난 간신히 엄마가 원하던 대학에 붙었다. 그 때도 역시 난 합격의 기쁨보다 엄마의 잔소리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이, 더 이상 그 지긋지긋한 과외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이 더 기뻤다. ‘난 엄마가 하라는 것 다했어. 이제 끝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진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대학교 1학년 봄, 내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된 작은 사건이 터진다.

입시의 스트레스도 날려버리고 전공에 대한 부담감도 덜한, 일생에서 한 번뿐인 아름다운 20살의 봄날. 꽃향기 흩날리는 봄밤의 정취를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당시 대학 사진동아리 활동으로 부처님 오신 날 연등제 출사에 나갔다가 어찌어찌하여 너무 늦게(?) 귀가하게 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엄혹한 시절이라 그래봤자 12시 전에 들어왔다. 난 무릎 꿇고 고개 푹 숙인 채 두 시간 동안 벌을 섰다. 그리고 1 라운드에는 아버지의 호통이, 2 라운드로는 엄마의 꾸지람이 이어졌다. 사실 그때 난 반성하기보다는 빨리 이 시간이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건넨 엄마의 호소가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난, 네가 시집가는 간판으로 대학 졸업장이나 따라고 그렇게 공부시킨 것 아니다. 나는 네가 네 이름을 갖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기 바라서였다. 제발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외할머니의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부잣집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집안어른끼리 맺어준 대로 시집온 외할머니. 만석꾼 집안의 맏며느리로 집안에는 유모, 침모, 찬모, 행랑어멈까지 부리는 사람이 줄줄이 있었지만 워낙 큰살림을 꾸려가느라 하루 종일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전형적인 ‘아씨’였다. 단 한 번도 당신의 의지대로 당신을 위해서 사신 적이 없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말을 못해서 혼자서는 집밖에도 나가지 못했던 ‘구식 여성’ 외할머니. 표현은 안하셨지만 외할머니 역시 가슴에 맺힌 한이 어찌 없었겠나. 아마도 엄마가 나에게 그랬듯이 외할머니 역시 당신의 딸에게 바라셨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1960년대 중반 어머니와 필자, 외할머니. ⓒ정은미
1960년대 중반 어머니와 필자, 외할머니. ⓒ정은미

엄마의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아들, 딸 구별이 유난하던 시절 외할아버지의 편애와 형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막내딸의 특권을 톡톡히 누리며 살았던 응석받이 엄마. 엄마는 외삼촌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외할아버지와 겸상이 허용됐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러기에 엄마의 어떤 행동도 집안에서 용서되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엄마는 경기여고,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당대 최고 엘리트 여성으로 성장했다. 외할머니의 바람대로 엄마는 50년대 멋쟁이 ‘신여성’ 딸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엄마의 이름과 졸업장 그리고 집안의 후광은 시집 갈 때까지만 유효했다. 결혼과 동시에 엄마의 호칭은 며느리, 엄마, 부인으로 바뀌었고, 엄마의 이름은 잊혀졌다. 그리고 대를 이을 장손을 낳고 봉제사를 받드는 것이 결혼하자마자 맏며느리 엄마에게 부여된 주요 임무였다. 자존심 강하고 완벽주의자였던 엄마의 시집살이는 처음부터 혹독했다. 내가 태어난 날, 친가 쪽에서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다. 아들 낳으려다 연년생으로 둘째 딸을 낳은 엄마는 나를 안고 밤새 하염없이 우셨다. 그 옆에는 외할머니만 계셨다. 엄마는 나를 낳고 2년 후 부단한 노력 끝에 결국 아들을 낳아 소임(?)을 다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외치셨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1950년대 후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식 후 어머니. ⓒ정은미
1950년대 후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식 후 어머니. ⓒ정은미

난 엄마처럼 살고 있지 않아요

신입생 시절 일어난 작은 소동은 내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꿔 놓았다. 그때부터 난 인생의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표를 짜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엄마의 호소는 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였고, 내가 나태해지고 길을 잃을 때마다 등댓불이 되어 앞길을 비춰 주었다.

이 글을 준비하느라 엄마와 같이 찍은 사진을 찾았지만, 어찌 된 일이지 최근에 엄마와 같이 찍은 사진이 없다. 나의 무심함에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무신경한 사이 급격히 노쇠해지신 엄마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꾸지람을 들을 수도, 나와의 기억을 같이 나눌 수도 없다. 하지만 엄마, 보세요. 나는 엄마처럼 살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이대로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세요.

정은미 명지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화가)
정은미 명지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화가)

<정은미>

명지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 화가, 미술 저술가로 활동 중. 국내외에서 18회의 개인전 개최. ‘화가는 왜 여자를 그리는가’ ‘아주 특별한 관계’ ‘미술 속 시간여행’ ‘세잔 사과에서 출발한 새로운 미술’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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