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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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란/ 여성학자





여중생이건 여대생이건 주부건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납치해서 살해하는 이 끔찍한 시대에 제게 딸이 없음을 감사합니다. 그에 앞서 딸로 태어난 제게 이 나이 되도록 그런 일이 비켜 간 걸 감사합니다. 또한 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런 일로부터 안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저희 아들들이 오늘까지 무사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청년실업의 바다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서 이태백이 안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일찍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노는 제 남편이 노후대책을 세운다며 통닭집을 차리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가장 경기를 타지 않는 음식 중 하나가 닭고기라고들 하던데 그 말에 솔깃해서 알량한 전재산을 털어 넣었다가 이렇게 뜻밖에 조류독감이라는 날벼락을 맞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리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도 그렇지, 이토록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닭고기를 외면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또한 서울생활에 덧정이 떨어진 제 남편이 이참에 시골 가서 농사를 짓든지 닭이나 키우자고 저를 끌고 내려가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농촌생활에는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순 진짜 원조 도시사람인 데 대해 감사합니다. 농사는 작파하고 국회 앞에서 시위를 했을지 모를 참담한 경우를 미리 피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찾은 소박한 고마움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외에도 감사할 것은 많고도 많습니다. 저희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젊은 부부가 오늘도 화목하게 살아 주어서 감사합니다. 부부싸움하다가 홧김에 불을 지르면 저도 크게 다치거나 죽을 지도 모르는데 이런 비상사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감사합니다.



위층의 부부도 여든 살을 넘으셨다는데 치매에 걸리지 않고 꼬장꼬장하게 건강하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가끔 남비를 태우는데 윗집 어머니에겐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드니 이처럼 감사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참, 오늘도 지하철을 네 번이나 탔는데 한 번도 제가 탄 전동차에 뛰어드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뉴스에서 듣고 보는 것만도 몸에 소름이 돋는데 내 눈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제가 무사했을까요. 또 함께 탄 사람들 가운데 불만과 좌절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왜 없었겠습니까만 다행히 너 죽고 나 죽자고 불을 지른 사람이 없었으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모두 이 험난한 세상을 묵묵히 참고 살아주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



끔찍한 일들 짜증내고 분노할 기운도 없어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동안 공사장이 두 군데나 있었는데 변변히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것도 없고 역시 수상쩍게 가려놓기만 한 바닥이 꺼지지도 않았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브레이크 고장이나 음주운전 때문에 제가 걷던 인도로 돌진해 온 자동차들도 없었으니 감사합니다. 걸어가는데 다짜고짜 칼로 푹 찌르고 도망가는 사람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찾아간 곳은 낯선 건물이었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 바닥을 확인해 보지 않고 그냥 덥석 발을 디뎠는데 다행히 바닥이 그대로 있어 감사합니다. 물론 강도일까 아닐까 의심되는 사람과 함께 타지 않은 것도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도둑이 들어온 흔적이 없으니 감사합니다. 기분도 나빴겠지만 그보다 훔쳐갈 게 없어서 미안할 뻔했으니까요. 별것 아닌 일인데도 몇 시간만 외출했다 돌아오면 몸이 널치가 되어 그대로 방바닥에 퍼지게 되는 것도 감사합니다. 몸이 곤하니 무슨 큰 욕심을 또 갖겠습니까. 9시 뉴스를 보면서도 짜증내고 분노할 기운도 없으니 감사합니다. 그저 내가 저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 감사할 뿐입니다. 뭉칫돈을 받을 만한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는 것도 감사합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는 건 생각만 해도 춥지 않습니까.



가끔씩 아주 가끔씩 멋진 사람들도 등장해서 순식간에 처졌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주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감동이 훨씬 줄어들 텐데 그렇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오늘까지 살아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살아 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다는 것,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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