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이의 마음대로 책 읽기] #미투 폭풍을 불러온 기자들
[박선이의 마음대로 책 읽기] #미투 폭풍을 불러온 기자들
  • 박선이 기자
  • 승인 2021.10.16 09:00
  • 수정 2021-10-16 2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녀가 말했다(She Said)』 조디 캔터, 메건 루히 지음
송섬별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2017년 10월 5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의 하비 와인스타인 성범죄 고발 기사. ⓒ뉴욕타임스 캡처
2017년 10월 5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의 하비 와인스타인 성범죄 고발 기사. ⓒ뉴욕타임스 캡처

“미안해, 내가 습관이 되어서 그래.”

왜 어젯밤 자기 가슴을 만졌는지 따지는 여성 직원에게 할리우드 거물(power house) 하비 와인스타인은 그렇게 답했다. 

세계적인 스타 애쉴리 저드, 귀네스 팰트로, 안젤리나 졸리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피해자였다. ‘펄프픽션’ ‘엠마’ ‘셰익스피어인 러브’ 등 숱한 히트작을 만들어온 와인스타인이 3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여성 배우, 회사 여성 직원들을 끊임없이 성추행하고 거액의 합의금으로 입을 막아왔다는 뉴욕타임스 기사는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미투 폭풍의 서곡이었다.  

2017년 10월5일 뉴욕타임스는 “하비 와인스타인이 수 십 년 간 성추행 고발자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는 제목의 탐사보도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사의 중견 여기자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가 쓴 이 기사는 20년 전 사건에서 시작한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로스앤젤레스의 페닌슐라 비벌리힐즈 호텔로 애쉴리 저드를 초대했다. 비즈니스 조찬으로 생각하고 있던 저드는 그의 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목욕 가운만 걸친 그는 저드에게 마사지를 해줄 수 있다면서 그게 싫으면 자기가 샤워하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그가 기분 나쁘지 않게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만 생각했다고 저드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미국 할리우드 최고의 제작자로 명성을 날린 하비 와인스타인(왼쪽에서 두 번째)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일으켰다. ⓒ스톰픽쳐스코리아
다큐멘터리 드라마 ‘와인스타인’ 한 장면. 미국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로 명성을 날린 하비 와인스타인(가운데)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일으켰다. ⓒ스톰픽쳐스코리아

기사 내용은 엄청났다. 레아 세두, 케이트 베킨세일, 에바 그린, 헤더 그레이엄, 로몰라 가라이, 미라 소르비노, 로재나 아켓, 숀 영, 세라 폴리 등 세계적인 여배우들과 로라 매든, 젤다 퍼킨스, 로웨나 추 등 와인스타인의 영화사 직원을 포함한 와인스타인 성추행 피해 여성의 명단은 뉴욕타임스 취재 결과 100명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이 기사에 와인스타인은 격렬하게 반발하고 뉴욕타임스를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며, 성추행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의 힘은 컸다. 2018년 5월 여러 건의 강간 혐의 등 1급 범죄 혐의로 기소된 그는 뉴욕타임스 폭로 기사가 나온지 2년 5개월 만인 2020년 3월 11일 23년 형을 선고받았다. 피해 여성들과는 1880만 달러(약 226억 원) 배상에 합의했다.

『그녀가 말했다(She Said)』 조디 캔터, 메건 루히 지음, 송섬별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그녀가 말했다(She Said)』 조디 캔터, 메건 루히 지음, 송섬별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그녀가 말했다』는 이 기사를 보도했던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 기자가 쓴 취재보도의 기록이다. 두 기자가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풍문’에서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은 손에 땀을 쥐듯 긴박하게 펼쳐진다. 이들은 “여성들의 힘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면서도 “그럼에도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하고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일은 너무나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과학자, 종업원, 치어리더, 기업 간부와 공장 노동자들은 급여를 받기 위해 원치 않는 접근 앞에서도 미소를 지어야 했다”고 성추행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한다. 두 기자는 “성범죄는 권력의 문제”라고 잘라 말한다. 와인스타인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은 “권력의 균형으로 따지면 나는 0, 그는 10이었다”고 자괴한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피해 사실은 물론 합의 내용까지 발설하지 않는 ‘침묵 조건’으로 거액 합의를 계속해 온 와인스타인 사례를 이들은 “기밀유지 조항의 가혹한 진실은 성폭력 가해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20년 전 이미 애쉴리 저드가 “유명제작자가 성추행을 일삼고 있다”고 <버라이어티>에 말했는데 왜 와인스타인의 성추행은 묻혀져 왔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두 기자는 와인스타인이 ‘지위를 이용해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남성’이며, 세계적인 스타라 할지라도 ‘일’ 때문에 성추행을 당할 수 있다는 ‘위계에 의한 성범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할리우드 스타들 뿐 아니라 패스트푸드점 종업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이야기(성추행 피해)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기자의 책무는 정보를 검토하고, 입증하고, 확인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p305)이라며 수많은 성추행 고발과 증언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특정성에서 나온다. 즉, 이름, 날짜, 증거, 그리고 패턴(을 확인하는 것)”(p20)이라고 딱 짚어 말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말했다』는 언론의 사명과 취재보도 윤리를 충실하게 확인하는 저널리즘 교과서이기도 하다. 초대받지 않은 집의 문을 두들기고, 침묵하는 증인의 말문을 열고, 감춰진 공식 기록을 찾아내는 취재 과정 뿐 아니라 “가해자 개개인을 넘어 성폭력을 이토록 만연하게 하는 동시에 해결하기 어렵게 하는 시스템을 짚어”낸다는 취재 목적은 보스턴 가톨릭사제들의 어린이 성추행 사건을 파헤친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국에서도 2018년 안희정 충남지사 성폭력, 2020년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고발 등 높은 지위에 있는 남성들의 여성 직원에 대한 성범죄가 강력한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고, 고은 시인, 이윤택 연출가, 김기덕 감독, 조민기 배우 등 문화계 유력 인사들의 성추행에 대한 미투가 잇따랐다. 오래 전부터 ‘풍문’으로 떠돌았지만 쉬쉬하는 가운데 묻혀져 왔다는 점에서 하비 와인스타인 사례와 너무도 닮아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탐사보도는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하비 와인스타인이 강간 혐의 등으로 뉴욕 경찰의 체포가 임박하자 2018년 5월 25일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하비 와인스타인이 강간 혐의 등으로 뉴욕 경찰의 체포가 임박하자 2018년 5월 25일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