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정치 선 넘기] 국회에도 ‘위대한 수업’이 필요하다
[2030 정치 선 넘기] 국회에도 ‘위대한 수업’이 필요하다
  •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
  • 승인 2021.10.17 11:09
  • 수정 2021-10-17 1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대한 수업 Great Minds. ⓒEBS
위대한 수업 Great Minds. ⓒEBS

얼마 전 EBS에서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라는 야심 찬 기획을 선보였다. 정치, 경제,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 세계의 석학들이 등장하는 동영상 강의를 만들고 이를 우리말로 더빙해 방영하는 기획이다. 강의자 명단에서 미국 버클리대의 세계적인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반가움과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젠더’ 이론가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차별금지법 발의 이후 우리 의원실과 공동발의 의원실, 그리고 정의당에 빗발쳤던 사실무근의 원색적인 공격과 비난이 프로그램 제작진과 EBS를 향해 눈처럼 쏟아질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는 주디스 버틀러 강연을 방영하지 말라는 항의성 글이 쇄도했다. 강연자에 대한 허위 정보, 합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속출했다. 일부 언론사들은 이런 글들을 재료 삼아 주디스 버틀러에 관한 허위사실과 이에 따른 비난을 그대로 전시하는 무책임한 기사를 내보냈다. 속상한 얘기지만, 이런 공론장 왜곡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대략 예상한 전개다.

신선한 것은 이 상황에 대한 EBS의 쿨한 대응이었다. EBS는 주디스 버틀러의 강의 방영 예정일인 9월 21일에 짤막한 공지를 시청자게시판에 올렸다.

“EBS는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주디스 버틀러에 관련한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과 타당성 검토를 진행한 결과 사실과 다름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객관적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한 해당 언론사에 대해 정정 보도를 요청할 것입니다.”

프로그램은 예정된 시간에 방영되었다. ‘위대한 수업’의 제작진들은 불합리한 비난 앞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써 반론이나 해명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다만 일부 언론이 강의자에 대해 제기한 주장의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고, 이후 예정대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 결과 우리는 생물학적 성별이 그 자체로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미리 규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명제에 관해 공적으로 토론할 좋은 계기를 갖게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할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결코 그 누구의 말할 기회도 빼앗지 않았다. (지금도 시청자 게시판에서 주디스 버틀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라.)

특정한 손가락 모양이 남성들을 비난하는 상징이므로 검열하고 금지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앞에 굴복한 여러 기업과 공공기관들의 공적 퇴행을 보다가 EBS와 ‘위대한 수업’ 제작진들의 상식적인 대응을 보니 반갑고도 부럽다.

지금 국회에는 차별금지법이 2007년 첫발의 이래 14년째 소관 상임위에서 단 한 번도 논의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를 누구보다 소리 높여 의제화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공적 책무를 지닌 국회가 오히려 차별금지법을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세력의 눈치를 살피며 토론 그 자체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 촉구한다. 많이 바라지 않는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위대한 수업’ 제작진들만큼만 하자. 이 불평등과 재난의 시대에 부당한 차별과 혐오로부터 시민들을 지킬 수 있는 법안에 가해지는 근거 없는 주장들을 기각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시작하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한국 국회 내 성소수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비롯해 이를 전시하거나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혐오정치를 비판했다.  ⓒ장혜영 의원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장혜영 의원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