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김소임 건국대 영어문화학과 교수
어머니 김세영 이화여대 영문과 명예교수

김세영 교수와 딸 김소임 교수 ©김소임
김세영 교수와 딸 김소임 교수 ©김소임

나의 어머니는 코리안 드림을 이룬 분이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 외조부의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외조부는 1894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셨다. 늙은 부모의 막내로 태어난 외조부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하고 집 근처 서당을 다니셨다. 서당 시절 점심시간에는 각자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는데 조부의 경우 집에 밥이 없어 고추장과 물을 퍼먹어 입을 불그스레하게 만들어 밥을 먹은 냥 했다고 한다.

작은 형이 하던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을 몰래 먹었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그 이후로 함흥을 벗어나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출을 감행했다. 굶주렸던 소년은 기차 승무원이 되어 만주부터 부산까지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식당차에서 양식 등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조부는 서울에 올라와 경험을 살려 제빵회사를 차리고 빵과 과자를 여러 기관에 납품하셨다.

그 무렵 우리 어머니가 탄생한다. 1929년이었다. 외조부 연세 36세이고 외조모 연세 32세이셨으니 어머니는 늦게 얻은 참으로 귀한 딸이었다. 어머니 위로 3명의 딸을 잃은 조부모는 이 딸마저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며 오래 살라고 이름을 인간世 길永으로 부치고 아명을 개똥이라고 하셨다. 귀한 아이일수록 거친 이름으로 불러야 탈이 없다는 뜻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 김세영 교수 ©김소임
미국 유학 시절 김세영 교수 ©김세영

어머니는 밑으로 남동생 둘을 보면서 공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 밑에 여동생 둘까지 합쳐서 어머니 형제 5남매는 모두 경기 고·여고에 합격하면서 교육 명문가의 초석을 닦는다. 아들은 서울대학교, 딸은 이화여자대학교에 합격한다. 1953년 휴전이 되자마자 어머니가 미국 유학을 떠나고 곧 이어 외삼촌들과 이모들도 뒤따라가 석사· 박사 학위를 받는 교육 명문가를 완성한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외조부모님들이 자녀 모두를 어떻게 그렇게 교육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분들을 그렇게 밀어 붙였을까? 어머니는 콕 집어서 답을 주시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치원 다닐 때부터 외조부는 “우리 세영이는 변호사 만들 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생히 기억하신다.

외조부는 딸을 자신은 상상도 못했던 ‘유치원’에 보내면서 큰 꿈을 꾸셨던 것이다. 1935년, 일제강점기의 한 가운데서도 조선인이 변호사가 되어 큰 소리 칠 수 있다고, 여자도 변호사가 되어 말과 글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외조부는 믿고 바라셨던 것이다. 그런 외조부의 꿈과 사랑이 병약했던 어머니를 키우고 북돋았다고 나는 믿는다.

유달리 입이 짧고 병치레가 잦았던 어머니를 외조부는 동생들 몰래 데리고 나와 화신백화점 양식당에서 치킨라이스를 사주시곤 했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고 회고하는 어머니는 치킨라이스가 아니라 외조부의 사랑을 그리워하시는 것 같다. 얼마 전 ‘화신백화점: 사라진 종로의 랜드마크 전시회’를 보면서 배를 곯으며 성장한 외조부가 딸이 화려한 백화점에서 치킨라이스를 먹는 것을 보실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며 뭉클했다.

외조부의 기대와 헌신이 하늘에 닿았는지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던 선교사 미스 칸로우의 도움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도미 유학을 하게 되었고 2년 만에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1955년이었다. 6.25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전설같은 이야기다. 

ⓒ김세영 교수
박사 학위를 받은 제자들과 함께 ©김세영

부산에 피난 가 있는 동안 김활란 박사님이 사장으로 계셨던 <코리아 타임즈> 기자 생활을 2년간 했던 어머니는 1953년 초봄 다짜고짜 부산 이화여대 교직원 숙소로 미스 칸로우를 찾아 가셨다. “선생님, 저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어요”라는 제자의 말을 미스 칸로우는 진지하게 듣고 길을 찾아 주셨다. 대학 동기동창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전액 장학생’으로 어머니를 추천했던 것이다.

1953년 상반기는 어떤 때인가? 휴전에 대한 논의가 아직 진행되고 있던, 전쟁의 불씨가 언제 다시 터질 지 알 수 없던 때 아닌가? 물론 선교사 선생님들과 김활란 박사님을 비롯한 이화여대 교수님들의 비전과 배려, 그리고 기도 덕이기도 하지만 함흥에서 단신 월남한 외조부의 자녀에 대한 기대와 꿈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중에도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외조부의 바램대로 변호사가 되진 않으셨다. 하지만 27세의 나이에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39년을 봉직하셨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셨다. 그리고 몇 년에 걸쳐 쓰신 ‘나의 아버지’란 제목의 회고담을 만 92세인 지금도 계속 수정 보완하고 계신다. 그만하면 병약한 어린 딸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 외식을 시켜 주며 여자도 전문직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심어 주신 외조부의 소망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나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전문직 여성이 되어 외조부 꿈의 작은 귀퉁이를 지키고 있다. 외조부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60년이 되었으나 그의 꿈은 더 크게 다가온다. 인생의 시작은 꿈이며, 그 꿈은 현실의 초석이 되지만 현실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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