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김이듬 시인
여성·장애인 등 약자 대변하는
등단 20년차 페미니스트 시인
한국 최초 전미번역상 수상도

김이듬 시인 작가 ⓒ홍수형 기자
2021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을 수상한 김이듬 시인은 “이 시대의 폭력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과 이 수상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홍수형 기자

2021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수상자 김이듬 시인은 소설가이며, 에세이스트이며, 책방주인이며, 책방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는 문화기획자이며,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고정희·최승자·김혜순 시인을 ‘한국현대 페미니즘 시인’으로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한 그 자신은 시 쓰기를 통해 ‘아름다움’과 ‘모성’에 갇힌 여성의 시어를 해방시켰다. 시집 『히스테리아』는 영어로 번역돼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인 전미번역상을 받았다. 아시아 시로는 처음이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기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시골 창녀」 끝 부분, 『히스테리아』, 2014>

경기도 고양시 일산 서구의 주택가, 사람들이 책 사러 이런 골목까지 찾아올까 싶은 한가로운 골목길 안쪽 ‘책방이듬’에서 시인을 만났다. 책방으로 올라가는 빨간 계단이 시인의 활력을 미리 보여준다.

-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트로피를 거머쥐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 수상은 특별한 영광입니다. ‘양성평등 가치 확산에 기여한 문화인에게 주는 상’이란 점에서 뜻밖의 용기가 되었습니다. ‘난해하다, 음란하다, 여성의 신경질적인 담화다, 불편하다’는 등의 평가를 많이 받았고, 심지어 면전에서 ‘이 따위 얘기를 시라고 썼느냐?’고 삿대질하는 문인도 있었습니다. 저는 제 글쓰기가 언어와 세계에 대한 격렬한 운동이며 수많은 억울한 이의 발언이기를 꿈꾸었습니다. ‘양성평등문화인상’은 그런 제게 국내에서 처음으로 주어진 격려입니다.” 

김이듬 시인 작가 ⓒ홍수형 기자
김이듬 시인 작가 ⓒ홍수형 기자

 

- 김 시인께선 『한국현대페미니즘시 연구』에서 “이 비통한 땅에서 시를 쓰고 읽는 모두에게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현실과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누군가에게 ‘불편’하고 욕설을 퍼부을 일인가요.

“그래서 이 상의 영광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근현대 여성작가들로부터 지금도 끔찍할 정도로 외롭고 치열하게 작업하고 있는 후배작가들에게까지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말 못할 경험을, 일상적 차별을, 수많은 죽음에 대한 증언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폭력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과 이 수상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김이듬 시인은 2001년 등단하여 첫 시집 『별 모양의 얼룩』(2005), 『명랑하라 팜 파탈』(2007), 『말할 수 없는 애인』(2011), 『베를린, 달렘의 노래』(2013), 『히스테리아』(2014), 『표류하는 흑발』(2017),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2019) 7권의 시집과 장편소설 『블러드시스터즈』(2011), 에세이집 『디어 슬로베니아』(2016), 『모든 국적의 친구』(2016),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2020), 연구서 『한국현대페미니즘시 연구』(2015)를 펴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경상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어들은 스스로를 ‘창녀’라고 부르거나 ‘푸른수염의 마지막 여자’로 자리매기거나 “할아버지의 입을 막으며 뱀으로 변해가”(‘유니폼은 싫어요’ 중)는 고통과 저항을 드러낸다. 남성시인 이성복이 아버지에게 쌍욕을 퍼부어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1980) 살부(殺父)의 언어를 보여준지 한 세대가 지나 여성 시인의 시에서 거침없는 언어들이 등장했다.

- 한국에서 여성의 시간은 남성보다 한 세대 늦게 오는가,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시인이 쓴 시어들은 그냥 나왔나요, 전략적으로 작정하고 사용했나요?

“작정하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플롯을 짜겠지만 시는 훨씬 날 것입니다. 사건이 생기면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이 나오죠. 감정의 폭로, 경험의 직시, 일상 경험 전반을 구성하는 사회적 현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이나 경험을 적확하게, 꾸밈 장치 없이 드러내는 그런 언어입니다.”

- 그런 시어가 적나라하게 사용된 것은 많이 낯선 일이었지요.

“내 시의 언어는 법률, 헌법, 교과서 같은 문서의 언어가 아닙니다. 가르치고 훈육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반대로, 소통에 목매지 않는, 그걸 목적으로 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저 어렸을 때 사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무당이 읊던 사설, 마치 방언하는 것 같은 접신의 언어로 써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여성시인, 여성작가들이 최근 한국 문학계의 중심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문단권력을 장악한 남성들의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프랑스 혁명도 인권과 평등을 말했지만 여성선각자 올랭프 드 구즈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문단에서도 페미니즘 이야기하면 촌스럽게 왜 그래? 이런 분위기였는데 실은 1980년대 이후 더욱 공고화된 것이지요. 미투 사건을 보면, 누가 정말 단두대에 오르고 싶겠습니까?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을 고발한 사건조차 포르노화 되었어요. 가해자를 옹호하고 문제제기 하는 여성도 있으니까요.”

- 시인의 이름, 이듬은 무슨 뜻인가요?

“영어로 넥스트. 저의 낙천적 허무주의죠 하하하. 내가 살아생전 대성하겠어? 넥스트, 다음 생에는 반 고흐처럼, 카프카처럼 죽고 나서 멋있어지겠지, 아님 말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부활, 재생의 의미도 있습니다.”

- 시를 쓰게 된 출발점은 언제인가요. 무엇이 시를 쓰게 만들었는지요.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주는 느낌?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들어줬어요. 사람은 왜 싸울까,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질문을 많이 가졌습니다. 시를 쓰면서 답을 구했지요. 처음 시를 쓴 것 초등학교 4학년 때예요.”

- 여성으로 겪은 고통과 경험, 사상을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의 작업을 불편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네 시는 추잡하다,’ 이러면서 자기들은 진짜 추잡한 짓 하기 때문이죠. 내 시에서는, 차별 받은, 이유 없이 미움 받은 사람의 고독감. 여자이기 때문에 받은 폭력, 그런 경험이 가장 큰 토대가 되어 막 나와요. 어느 대학 교수가 제자들과 성관계를 했는데,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요일별로 만날 정도로 여럿이었는데, 제자들이 다 자기를 사랑했다고 해요. 정말 제가 존경하던 선배 시인도 그 사건을 그냥 다 묻어야한다고 해요. 일상적으로 그런 것을 보면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일상인 한국 사회를 보면서, 어떻게 꽃을 노래하고 가을의 고독을 노래할 수 있나요. 나는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시집 『히스테리아』(김이듬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영어로 번역돼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인 전미번역상을 받았다.
시집 『히스테리아』(김이듬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영어로 번역돼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인 전미번역상을 받았다.

- 김 시인의 독자는 누구인가요? 독자들이 김 시인의 시를 통해 어떤 변화가 있기를 원하시나요?

“전에 사인회를 해보니 다른 시인 줄에는 넥타이 부대도 있고,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인데 내 앞에는 예전에 껌 좀 씹었을 거 같은 여성들이 많았어요. 하하하. 줄이 짧아서 사인회도 일찍 끝났고. 그런데 신기한 게, 찐 독자들 (시집 나오면 10쇄 정도 나간다고 했다) 팬덤이 있어요. 숨은 독자들, 자기를 그렇게 드러내지 않는, 느슨한 연대성을 가진 독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사회에 툴툴거릴 일 많은 사람들이죠. 시라는 것이 무엇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부조리, 권위, 구태의연한 관습, 그런 편견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으면 합니다. 지금의 삶이 그대로 가야하는지, 물어보게 되면 좋겠어요.”

- 『히스테리아』를 영어로 출판한 뒤 귀신, 무당, 죽음의 서사라는 평을 받았던데, 외국 독자들 반응은 어땠나요?

“전미번역상 시상 사유가 ‘의도적으로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시들로 구성된 흥미롭고 놀라운 작품’이고 ‘민족주의, 서정주의,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면서 한국 여성 시학의 계보를 새롭게 이어간다‘고 했어요. 한국에서는 과도하고 과격하다고 욕먹었고 비이성적이고 절제하지 못한다고 배척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오히려 그걸로 호평받았다는 게 놀라워요. 한국에서 ’좋은 시, 수상작‘이라고 하면 쉽고 부드럽고 지적이며 뭔가 눈물샘을 자극하고 어머니 은혜 그런 걸 이야기해야 교과서에 실리고 칭송받는데, 저는 그 취향에 맞추기 싫거든요. 어제 출근 버스에서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 ’어머니의 된장국‘을 듣고는, 아니 이삼대 청년들까지 어머니의 된장국, 어머니가 지어주신 따뜻한 집밥을 노래하고 있나 싶었어요.

-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요?

“페미니스트가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는 태도, 남녀가 서로 억압하고 폭력 쓰고 적대시 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끼리 입장 차이로 싸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페미니즘 침투의 방식이 좀 더 섬세하면 좋겠어요.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관심 가져야할 것 아닌가 합니다.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잘 살아보자는 건데 그게 자본의 문제, 성별의 문제로 환원되고 개인의 이익과 입장에 함몰되는 허술한 구조의 문제와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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