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화가 황주리씨
어머니 송연호씨

화가 황주리씨와 어머니 송연호씨. ⓒ황주리
화가 황주리씨의 어머니 송연호씨. ⓒ황주리

아침마다 구순의 어머니는 “오늘 너 뭐 먹고 싶니?” 하고 물으신다. 아침마다 그 말을 들을 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구순의 어머니께 육십도 한참 넘은 나이 든 딸내미가 어리광을 부린다. 매일 아침 이런 행복을 한 십년 더 연장해달라고 기도한다.

“오늘 너 뭐 먹고 싶니?”

서른 살에 뉴욕으로 떠나면서 밥 한 번 안 해본 나는 어머니의 18번 음식 레시피를 적은 노트를 짐 가방에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로부터 어언 34년이 흘렀다. 넷플렉스 일본 드라마 ‘카레의 노래’에서 어릴 적 카레를 자주 만들어준 어머니의 기억 탓에 카레라이스를 제일 좋아하는 주인공이 생각난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자주 해주던 오므라이스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고기와 감자와 우엉을 잔뜩 넣은 밥 위에 노란 달걀이 올라가 있는 오므라이스에 케찹을 얹어 먹던 그 맛을 어찌 잊으랴. 요즘도 가끔 어머니는 오므라이스를 직접 해주신다. 어머니의 노트엔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김치국밥 잔치국수 불고기 육개장 콩나물국 미역국 시금치국 된장찌개 새우·오징어·고구마튀김 등 어릴 적에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의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적어준대로 처음 지은 밥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넣고 쌀과 물을 몇 대 일로 하라는 어머니의 노트를 보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밥이라는 걸 해보았다. 처음엔 음식을 하는 내 모습이 어설퍼서 눈물만 나던 나는 매일매일 어머니의 레시피를 습득해갔다. 머지 않아 나는 음식을 꽤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절 가끔 딸을 보러 뉴욕에 오신 어머니는 어디 놀러 가자 해도 신청도 않고 맨해튼 32가 한인타운에서 장을 봐 매일 맛있는 한국 음식을 해주셨다.  

이상하게도 노트에 적힌 그대로 한 내가 만든 음식보다 어머니가 한 음식은 훨씬 맛있었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그리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손이 커서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던 잔뜩 쌓인 찐빵이라거나 옆구리가 다 터진 만두와 고로케, 너무 짜서 고기를 더 넣다 보니 하염없이 많아진 불고기무침이라거나, 실패한 음식의 기억이 떠오른다. 

화가 황주리씨와 어머니 송연호 ⓒ황주리
어린 황주리씨와 어머니 송연호씨. 초등 4학년 때 ‘국제어린이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황주리

우리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옷을 만들거나 집을 설계하는 일에도 뛰어난 감각과 재능을 지닌 팔방미인이다. 어릴 적 기억에 그리 훌륭하게 남아 있진 않은 어머니의 음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했다. 요리는 늘 끊임없이 진화하는 문명의 소산이다. 30여년 전 뉴욕 체류 시절엔 일본 음식이 최고로 유행하는 진화된 음식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한국 음식이 최고로 유행하는 요리가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국음식점에서 김치를 시켜서 우아하게 나이프로 잘라먹으며 맛을 음미하는 서양인들의 모습은 이제는 흔한 풍경이다. 그렇듯 우리 어머니의 손맛은 계속 진화하여 나의 기억 속에 최고의 맛으로 자리 잡았다. 레시피란 음식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삶의 레시피, 만남의 레시피, 거절의 레시피, 그 많은 레시피들을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보고 배운다. 

삶의 길 안내해 준 엄마의 레시피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런 글귀를 들은 기억이 난다. “세상의 모든 딸은 그 어머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어머니는 예민하고 여리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어린 나를 백 프로 이해해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너는 나를 똑같이 닮아서 네 마음 속이 다 보인단다” 하는 것만 같았다. 100% 소통이 가능한 대상이 존재한다는 건 요즘 유행 구인 “이 세상에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까? 늘 말이 없던 딸이 걱정된 어머니 덕분에 다섯 살 때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던 내 오랜 그림 그리기의 역사는 올해로 60여년이 되어간다.

산다는 건 매일매일 자신의 편견을 내려놓고 아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니 그 아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관해, 결국 자기 자신에 관해 끊임없이 배우는 일이다. 그렇게 말이 없던 내가 이렇게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될 줄은 진짜 몰랐다. 요즘엔 한 달이 멀다 하고 지인의 자녀 결혼식 아니면 부모의 장례식, 드물게는 본인의 부고를 알려오기도 한다. 

화가 황주리씨와 어머니 송연호씨 ⓒ황주리
화가 황주리씨와 어머니 송연호씨 ⓒ황주리

세월은 거짓말처럼 발이 달려 바람의 속도로 사라진다. 어느 새 내가 육십을 훌쩍 넘었고, 어머니는 구순이 넘으셨다. 내 어머니는 살아오는 날 동안 결혼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늘 너는 너만의 레시피로 단 한 번뿐인 삶을 맛있게 요리하라고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어쩌면 어머니가 무언 중에 내게 준 삶의 레시피는 자유의 레시피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라든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그리고 내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늘 노트에 적어둔 엄마의 레시피가 함께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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