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서혜경
26일 ‘라흐마니노프 스페셜 콘서트’
암 딛고 복귀한 지 13년
“피아노 없는 삶 상상 못해
120세까지 더 공부하고 연주하고파”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 ⓒ리음아트앤컴퍼니 제공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 ⓒ리음아트앤컴퍼니 제공

‘황제’의 칭호가 걸맞은 피아니스트다. 서혜경(61)이 돌아온다. 데뷔 50주년을 맞아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라흐마니노프 스페셜 콘서트’를 연다. 미국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다 약 2년 만에 갖는 국내 무대다.

서혜경은 이날 여자경 강남심포니 상임지휘자가 이끄는 유토피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다. 고난도 기교를 요구하는 악명 높은 곡이다. 여성 음악가들의 협연도 기대를 모은다.

암과 싸우고 돌아와 보란 듯이 무대에 섰던 13년 전에도 서혜경은 이 곡을 연주했다. 2006년 10월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에게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을지부터 물었다. 오른팔을 못 쓰게 될 수 있다, 피아니스트의 삶도 끝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증을 앓았다. 항암치료 8번, 방사선 치료 33번과 절제수술을 이겨내고 1년 3개월 만인 2008년 1월 예술의전당 라흐마니노프 콘서트로 복귀했다. 

올해로 56년째 피아노 앞을 지키고 있다. “제게 피아노는 산소 같아요. 피아노가 저예요(Piano is me)! 피아노 없는 인생은 상상이 안 가요.” 그는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혜경은 일찍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쳤다. 1971년 11세 때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협연하며 데뷔했다. 예원학교 시절 일본 유학을 떠난 뒤 미국으로 가 뉴욕 메네스음악학교와 줄리아드 음대에서 공부했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고, 유럽과 아시아 등에서도 수많은 독주회와 협연을 선보였다. 샤를 뒤투아, 네빌 마리너, 이반 피셔, 리카르도 무티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도 함께 연주했다.

1980년 나이 스물에 부조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동양인 차별이 심했던 클래식 음악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올해는 피아니스트 박재홍(22)과 김도현(27)이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후배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하다”고 했다.

병마와 싸워 이긴 후 ‘살아났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2010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앨범을 도이체그라모폰(DG) 레이블로 발매했다. 여성 피아니스트로는 최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 ⓒ리음아트앤컴퍼니 제공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데뷔 50주년을 맞아 오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라흐마니노프 스페셜 콘서트’를 연다. ⓒ리음아트앤컴퍼니 제공

“내겐 러시아의 피가 흐른다”고 할 정도로 서혜경은 러시아 음악과 인연이 깊은 연주자다. 1990년 한러 수교 이전부터 꾸준히 러시아 예술인들과 교류해왔다. 1988년 처음 내한한 모스크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냉전 이후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첫 문화예술 교류였다. 1989년 다시 내한한 모스크바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2015년 스크랴빈 타계 100주년 기념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연주하는 리사이틀도 개최했다.

이번 공연도 러시아와 인연이 있는 신예들과 함께한다. 16세에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에 오른 러시아의 다니엘 하리토노프(23)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들려준다. ‘러시아 피아니즘 거장’ 엘리소 비르살라제의 제자 윤아인(25)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10월 16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한러수교 3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국 대표로 출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협연한다. 11월엔 미 시애틀, 2022년 뉴욕, 2023년 마이애미에서 연주회를 펼칠 예정이다. 2022년 4월 11~17일까지 얍 판 츠베덴 뉴욕필 상임지휘자의 지휘로 홍콩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연주한다.

23일 소품집 ‘My Favorite Works’ 디지털 앨범도 발매할 예정이다.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 파데레프스키의 ‘미뉴에트’,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쇼팽의 ‘에튀드’ 등을 담았다. 코로나19로 봉쇄령이 내려진 뉴욕에서 보낸 2년간 그에게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은 곡들이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여성신문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여성신문

20여 년간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도 피아노를 놓지 않았던 서혜경은 “세계 최고, 1등이 다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매일 아침 건강하게 눈 뜨고 행복하게 피아노를 칠 수 있어서,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2008년 뉴욕에 ‘서혜경재단’을 설립해 유방암 환자와 형편이 어려운 피아니스트를 돕고 있다.

서혜경은 자신을 “로맨틱 스타일 피아노 계보를 잇는 연주자”라고 부른다. “속도와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보다는 우아한 정통파(authentic) 피아니스트, 노래하듯 다채로운 음색이 강점인 피아니스트, 인생의 깊이를 표현하고 아픈 곳을 치유하는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아직 배우고 익힐 게 많다고 했다. 요즘 멘델스존을 다시 연주한다며 “젊었을 때 만난 거장들의 곡이 새롭게 다가온다. 연구하고 싶은 게 많다”는 그의 눈이 빛났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연주하고 공부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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