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것. 이는 상대방이 숨기고 싶어하는 내밀한 아픔과

치부를 까발리는 야비한 행위로 종종 그 뒤틀린 얼굴을 내비치는 건

아닐까.

충격과 실의탓에 비에 젖은 들새처럼 떨리는 심신을 숨기고만 싶었

던 민홍은 박남존이 담요를 야멸차게 벗겨버리자 나신을 들킨 듯 부

끄러웠고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 그녀가 감추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남편으로부터 배신당한

서글픈 아내의 초상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탐욕에 짓밟히며 남편의

사랑을 받는데 실패한 여자로 결판났다는 사실은 남편에 대한 사랑

과 남편됨의 자격과는 무관하게 여성으로서의 민홍의 자부심을 송두

리째 난도질했다.

뭔가 잘못을 저지른 듯한 가책감도 심장께를 저몄다. 아직도 박남

존에게 더 실망하고 가슴 아파할 일이 존재함을 자인하는 일 역시

고역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기대

하지 말자고 얼마나 자주 다짐했던 그녀였던가. 그녀는 남편의 혼외

관계에 대한 배신감 못지 않게 그와의 불행한 결혼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자신에게 더욱 넌덜머리가 났다. 천근 만근 무

겁게 느껴지는 심신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는 엉거주춤 침대에 걸터

앉았다.

“왜 이젠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것 조차 귀찮나?”

적반하장격인 그에 대한 타는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민홍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얼얼한 통증에 대꾸할 말마저 잃어버렸다. 나… 나

는 무슨 말부터 꺼내어야 하나. 왜 당신은 허란을 사랑했으면서도

나를 속이고 나와 결혼했는가고 다그치며 그를 닥달해야 하는가. 그

래본들 내 노력이 무위로 끝난 이 현실을 되돌이킬 수는 없잖은가.

뼈아픈 인식만이 허탈감으로, 그리고는 뼛골이 시리는 냉기가 되어

차갑게 등줄기를 타고 내렸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당신네들이 벌였던 야밤의 연애행각을 목격

했었노라고 먼저 털어 놓아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과연 무엇을 얻

기 위해서 그의 사련을 따지고 나설 것인가. 다만 처절한 분노와 무

력감만이 그녀를 혼돈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승자처럼

당당한 박남존 앞에서 그녀는 사물에 대한 판단 기준마저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나가줄까?”

네에? 그제야 민홍은 박남존과 허란이 꾸며낸 기만극의 가장 큰 피

해자가 바로 자신임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알량한 기대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가정을 꾸려보고 싶었던 염원마저 수포로 돌아

간 마당에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체념과

패배감이 가슴에 체증으로 내려 앉았다. 그와 허란의 해묵은 열애관

계를 내 눈으로 목격한 터에 그에게 무엇을 더 확인할 것이며 무엇

을 더 바랄 것인가. 오히려 허란과의 사랑을 위해서라도 그가 그녀

에게 요구할 사항이 많을 터였다. 인간관계의 도리와 이치가 철저하

게 무너진 지금 그녀는 갈피를 잃은 채 허둥대고 있었다. 다만 분명

한 것은 이처럼 마음이 여러 가닥으로 찢어 진 채 갈팡질팡할 때에

는 몇명의 미래가 관련된 중요한 인간사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그나마 차선책이라는 생각만이 뇌리 속에 어른대고 있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추스릴 양으로 대퇴부에 힘을 주면서 말없이 방문

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그녀는 붙박이장문이 부숴지는 듯한 굉음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녀는 그를 돌아 보았다. 그녀에게

당장 대들 것처럼 시비를 걸었던 방금 전과는 달리 그는 붙박이장에

화풀이를 하면서 장속에서 스웨터를 챙겨들고 있었다. 야심한 시각

에 열정을 사른 그는 추위를 타는 것일까. 아님 그는 당장 집을 나

갈 셈인가. 가정이 깨진다는 사실이 와락 무섬증으로 다가섰다.

“지… 지금 당장 집을 나가시려구요?”

“왜 내가 집을 나가주기를 기다려 오지 않았어? 나는 당신이 원하

는대로…”

그것은 비굴하고 궁색한 가출변이쟎아요? 허나 충동적으로 치솟는

반발심마저 그녀는 오심과 함께 목젖 아래로 삼켰다. 그와 얘기다운

얘기를 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대화에 대한 바람마저 오래 전에 접어

두었던 터였기에. 그는 결혼 직후부터 그녀와의 대화 아니 그녀를

회피했다. 허란과의 관계를 숨기려는 고육지책이었을까. 아니면 그녀

와의 결혼이 착오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자마자 그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결별의 수순을 지난 오년간에 걸쳐서 밟아 온 것일까.

민홍은 쉼터로 나갈 양으로 방문을 열었다. 박남존은 물론 사람이

무섭게 느껴지는 지금, 그와 언쟁하기보다는 그의 연애 행각과 가출

이 초래할 여파를 가늠해야 할 때이며 그녀 편에서 어떤 단안을 내

려야 할 때라고 자신에게 일러 주면서.

“흥. 주무시지 않았었군. 설마 욕실 슬리퍼를 신고 잠을 청하진 않

았겠고.”

민홍은 엉겁결에 신고 나왔던 욕실 슬리퍼를 내려다 보았다. 참담

했다.

“침… 침대에 누워서 생… 생각을 했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서도.”

“걱정 마! 내 장래는 내가 챙기겠어. 당신은 당신 장래만을 생각하

라구!”

대화를 끊는 그의 뒤틀린 어투는 두 딸보다 막내 아들을 편애했던

그의 부모의 과잉 애정과 누이들의 시샘의 산물일 터였다. 민홍은

잠자코 방을 나섰다.

어딜 가? 그녀는 잠자코 거실을 질러 갔다. 민홍은 그녀로부터 도

망치고 싶어하는 그의 허리춤을 붙들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남성 심

리를 설파했던 심리학자의 저서를 읽은 뒤부터였다. '무엇이 여성을

분노하게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러너박사는 얘기했다. ‘남편이 무

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추적할수록 남편은 더 열심히 아내와 아내의 추적

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도망치게 되는 악순환 속에서 살아간다’고.

지금껏 아내 앞에서 ‘감정적인 도망자’로 살았던 그는 이제 연애

행각에 대한 자격지심탓에 아내의 추적자로 변모했을까. 그는 민홍

의 어깨를 거칠게 나꿔 챘다.

“기뻐 뛸 소식 들었지? 당신 친구 천사표 신랑 만나서 팔자 고치나

했더니 깜방살이 후유증으로 덜컥 죽을 병에 걸려서 오늘 내일 한대

지? 오죽 다급했으면 성직이 녀석 엘에이 의사 선배에게 전화했대쟎

아? 당신들에겐 기막힌 낭보 아냐?”

민홍은 친구의 비보에 심장께가 예리한 흉기로 찔린 기분이었다. 허

나 무서운 광기 속으로 그녀를 몰아간 것은 사람의 생명을 조소하는

그의 독설이었다.

“죽음의 사신이 아닌 바에야 친구의 발병은 낭보일 수가 없죠. 기

막힌 비보를 전해주기 전에 당신은 낭보인 당신의 열애소식부터 얘

기해 주셨어야죠.”

“유아 키딩(웃기네). 내 열애소식? 열애는 당신 얘기 아냐? 사기치

지 마.”

“사기극은 당신네 얘기죠. 친구의 생명을 능멸한 행위는 용서못해

요.”

“어쭈!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할테야? 때릴테야? 내가 맞을 것 같

애, 하!”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경멸하는 당신들의 추악한 사랑을 저주하겠

어요.”

역습에 놀란 그의 동공이 흔들린 찰나 민홍은 남편에게 다가 섰다.

천천히.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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