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형 청강문화산업대 이사장
어머니 정희경 전 이화여고 교장

젊은 시절 엄마와 어린 나.  ⓒ이수형
젊은 시절 엄마와 어린 나. ⓒ이수형

엄마...

나의 엄마는 올해 구순을 맞았다.

평생 분주하고 ‘화려하게’ 살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요 몇 년간만큼은 지극히 평온하고 순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니 딸로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참 어렵다. 한 사람에게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사람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모녀 관계에서는 오죽하랴. 엄마를 떠올려보면, 엄함과 자비로움, 노련함과 천진함, 자비로움과 칼 같은 원칙주의, 진지한 고뇌와 유머 감각, 근면함과 자유함, 대범함과 섬세함...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이 대립쌍을 지어 줄줄이 등장한다.

‘슈퍼우먼’으로 산 나의 롤 모델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과 무정부시대를 거쳐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겪어내며 1대 대통령부터 현재 19대 대통령까지, 문자 그대로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 전부를 한 몸으로 통과한다는 건 어떤 삶일까. 그런 혼란한 시대에 미국유학까지 다녀와 대학교수와 최연소 교장, 심지어 최초 남북적십자회담의 유일한 여성대표를 거쳐 국회의원까지 경험하는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인 걸까. 직업을 가지고 치열하게 활동하는 여성 1세대의 그린 듯한 모델과도 같은 당신의 삶. 딸로서는 닮고 싶기도, 또 외면하고 싶기도 한 그런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공교육을 전혀 받지 않으셨던 우리 외할머니는 매우 사리가 바르고, 영특하고, 솜씨 빼어난 분이셨다. 외할머니는 당신의 두 따님을 아들과 차별 없이 키우시며, 그 시절 미국유학까지 갈 수 있게 교육에 대한 지지를 해주셨던 분이셨지만(사귀는 남자가 생겼다고 하니 공부부터 끝낼 것이지 결혼이 뭐가 급하냐고 못마땅해 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동시에 두 따님에게 ‘살림’도 혹독하게 가르치셨던 분이셨다. 우리 엄마는 그런 어머니 영향인지 살림하는 것은 ‘살리는 일’이라며 취미도 능력도 있으셨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고달프게 일하는 여성이기도 했다. 

정희경 이사장은 혼란한 시대에 미국유학을 다녀와 대학교수와 최연소 교장을 거쳐 최초 남북적십자회담의 유일한 여성대표,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이수형
혼란한 시대에 미국유학을 다녀와 대학교수와 최연소 교장을 지낸 엄마는 뼛속까지 교육자였다. ⓒ이수형

“이 사회에서 여자가 인정받으려면 남자의 10배는 노력해야 해.”

엄마가 자주했던 말. 나로서는 여간 부담이 되는 메세지가 아닐 수 없었다.

‘슈퍼우먼’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때론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버거울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욕하면서 닮는다고, 엄마의 말과 모습은 어느새 나에게까지 스며들었나 보다. 엄마처럼 ‘슈퍼우먼’ 노릇을 어설프나마 즐거이 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의 정치 성향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엄마는 대학시절부터 강원룡 목사님의 곁에서 지도를 받았기에 오랫동안 진보적 인사로 분류되었지만, 세월이 지나 보수 딱지를 받아도 별로 억울해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당신은 그저 자타공인 상식적이고 도리에 맞는, 누구보다도 애국하는 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시대상 진보 성향으로 보였고, 지금은 보수라고 분류될 뿐이다.

검소함도 빼놓을 수 없다. 수려하고 당당한 외모와 풍채 때문인지, 사치스러울 거라는 시선이 항상 따라다니던 당신. 당연히 골프 정도는 칠 것이라는 오해를 받곤 했는데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나라 국토를 훼손하는 것도 싫고, 분에 맞지도 않으시다며 평생 골프라는 운동 근처도 가지 않으셨다. 그 뿐이랴. 속내의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함이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배어 있는 분이셨다. 오래 앓고 있는 천식으로 휴지를 달고 사시는데, 그것조차 축축해질 때 까지 접고 접어 쓰셨다. 언행일치의 화신이라 불려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꼿꼿하여, 자식들이나 주위사람들까지 힘들 때, 물론 많았다.  

정희경 전 청강문화사업대 이사장 ⓒ이수형
정희경 전 청강문화사업대 이사장 ⓒ이수형

뼛속까지 교육자, 언행일치의 화신

아버지 사업이 다시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검소하게 사셨는데, 단순히 돈이 아까우셔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인 재산 중 큰 액수를 흔쾌히 사회 여러 곳에 기꺼이 기부하곤 하셨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곳은 늘 도와주시려고 했고, 사람 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러다 실망을 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언제나 통 크게 베풀 준비를 하고 있는 분이셨다.

그런 우리 엄마는 신명나게 노래도 잘 하셨고, 호기심도 왕성하셨고, 농담도 잘해서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드는 재주도 있으셨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불러다 먹이는 것을 가장 좋아하셨다.

‘차린 건 없지만,’ 혹은 ‘맛은 없지만’ 많이 드시라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이해할 수 없다며, 매번 "맛있으니 많이 드세요"하고 권하셔서 손님들을 폭소하게 하는 건 다반사. 없는 틈을 내서라도 사계절 내내 푸짐한 음식을 차려 손님을 대접하곤 하셨는데, 그동안 엄마의 밥을 먹은 사람은 족히 수백 명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의 노년을 관찰하며 엄마의 삶에 대한 학습이 끝날 때쯤에는, 나도 내 딸에게 그런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이수형
엄마의 노년을 관찰하며 엄마의 삶에 대한 학습이 끝날 때쯤에는, 나도 내 딸에게 그런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이수형

그렇게 언제까지나 씩씩하기만 할 것 같던 엄마는 25년 전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린 뒤 예상보다 길고 깊은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여러모로 아버지를 많이 의지하고 사셨던 두 분만의 정 깊은 관계가 짐작되고도 남았다. ‘천하의 정희경’이라고 불리던 분이 얼마나 아버지의 자정 깊은 ‘외조’를 잃고 황망했을까. 여자든 남자든, 세상에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누군가의 지극한 지지와 사랑이 한 사람을 얼마나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엄마는 그 놀라움을 아는 분이었기에, 더 깊게 아프셨다.

평생 교육자로 사셨고, 잠깐의 외도(국회의원)도 현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교육의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순진한’ 의지로 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나의 엄마는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뼛속까지 교육자가 분명하다. 요즘도 집안에서 휠체어를 의지하여 지내지만, 방을 나오면 꼭 “전기 꺼라”로 시작해 “학교는 잘 되어가고 있니?”를 잊지 않는 우리 엄마. 투병 중에도 여전히 유쾌한 성정과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주위를 웃게 만드는 우리 엄마, 저녁이면 휠체어를 타고 거실을 돌며 고정 노래 레파토리를 돌아가며 부르는 우리 엄마, 기력이 많이 쇠했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쉼'이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행한 노후를 보내는 참 복 많은 당신, 우리 엄마.

‘유명한 여성 지도자’라고 불리던 너무 큰 엄마의 그늘 아래서 위축되던 나, 항상 스스로가 마음에 든 적이 별로 없던 나, 이수형이라는 딸도 이제 육십, 이순을 넘겼다. 돌이켜보니 비로소 지난 모든 시간,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보여줬던 그 모든 것이 나에겐 중심이요, 잣대요, 울타리였음을 알게 된다.

아직도 엄마에 대한 정리된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은 딸로서는 당신이 가신 후, 당신이 남기고 떠날 어마어마한 정신적 유산을 추억하며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먹먹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엄마와 딸은 변하지 않고 진화한다던데, 나도 나의 딸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엄마의 노년을 관찰하며 엄마의 삶에 대한 학습이 끝날 때쯤에는, 나도 내 딸에게 그런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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