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 재직 시절의 안수산. ⓒ필립 안 커디
미 해군 재직 시절의 안수산. ⓒ필립 안 커디

 

다민족 국가 미국은 매년 5월을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의 달로 지정하고, 미국의 발전과 진보에 공헌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업적을 기념한다. 도산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은 아시안 여성 최초의 해군 장교라는 기념비적인 성취로 인해 해마다 5월이면 백악관과 국방성, 그리고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미국 역사 진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젠더적 편견과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 낸 안수산의 삶을 소환하는 작업을 통해 도산의 가르침과 그의 딸 안수산의 선구적 업적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안수산은 1915년 캘리포니아 LA에서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의 장녀로 출생하여 2015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 세기에 걸쳐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아시안 여성 최초의 해군 장교, 미국 여성 최초의 항공 포격술 장교가 되었고 미 해군의 엘리트 암호해독팀 대위를 거쳐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소비에트 전담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은퇴한 이후에는 독립운동가의 딸로서 한국과 소통을 지속했고, 한인 이민 개척자들의 역사를 보전하면서 미국 내 한인공동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삶을 할애했다.  

안수산 ⓒ필립 안 커디

안수산 여사는 암호분석관으로 일하다 동료 프랜시스 커디와 만나 결혼했다. 신혼시절 두 사람이 장난기 어린 복싱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필립 안 커디

 1929년 LA피구로아 106번지 뒷마당. 왼쪽부터 둘째 딸 안수라, 안창호 선생의 배우자 이혜련 여사, 맏딸 안수산, 어린 남자아이는 안필영. ⓒ필립 안 커디

아버지 안창호와 어머니 이혜련

안수산과 그의 형제들은 미국 땅에 뿌리 내린 미국 한인공동체 집단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인 2세대들이었다. 그들의 유년기에 아버지 안창호는 한인들을 위한 대외적인 일로 늘 바빴다. 안창호의 지도력은 초기 미국 한인사회가 소수민족 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지만, 가족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늘 가난과 싸워야 했다. 가장의 부재로 인해 겪어야 했던 어려운 환경은 안수산의 독립적이고 강인한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인이 된 안수산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매 순간 보여주는 결단력은 유년기에 형성된 이러한 성격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안수산은 스스로 자신의 성격은 아버지 안창호의 교육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LA 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한국적 표준으로부터 유난히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그의 딸들이 ‘여성적이 아니라 거칠게’ 자라나는 것을 허용했고, 우리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안수산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야구선수로 활동을 하거나 군대라는 집단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버지의 자유로운 양육 철학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20세기 초반에는 미국 한인공동체 내에도 여전히 가부장적인 전통이 팽배했다. 안수산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가부장적 사고를 했던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과 존경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안수산은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심을 항상 표현했었고 이는 그의 전기 곳곳에서, 그리고 여러 인터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안수산의 회고에 의하면, 도산이 미국에 머무를 때나 떠나있을 때나 그의 집은 항상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중심인물은 이혜련 여사였다. 안수산의 기억 속 어머니는 늘 강인한 모습이었고 그는 그런 어머니를 닮고자 했다. 어머니를 회고하는 안수산의 모습에서는 늘 어머니와 딸의 유대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안수산이 강인하면서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한인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안수산 여사는 암호분석관으로 일하다 동료 프랜시스 커디와 만나 결혼했다. 신혼시절 두 사람이 장난기 어린 복싱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필립 안 커디
안수산 여사는 암호분석관으로 일하다 동료 프랜시스 커디와 만나 결혼했다. 신혼시절 두 사람이 장난기 어린 복싱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필립 안 커디

편견과 차별의 극복

안수산이 입대할 당시 미국 사회는 여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에 살고 있던 한인들 역시 여성이 군대에 입대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안수산은 한국적 전통이나 당시의 젠더적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안수산이 로스앤젤레스 시티칼리지(LACC) 재학 시절 첫 번째 아시안 아메리칸 여자 야구선수로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해군에서 여성 최초의 포격술 장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적인 젠더 규범에 대해 자유로운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제도적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면 자신이 목표한 어떤 것이든 의지대로 실행에 옮기는 그에게도 넘지 못할 벽은 있었다. 당시 군인 안수산이 마음속 깊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제로스를 격추할 기회를 얻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안타까워했다. 그는 “어떤 것에서 최초가 된다는 것은 축복과 저주라는 대가를 동시에 치르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여성 장교로서 받게 된 주변의 관심과 기대에 대한 부담과 함께, 그 역시 당시의 젠더 인식에 대해 자유로울 수만은 없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안수산은 유색 인종인 아시안들에게 가혹하고 차별적인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 역시 극복해야 했다. 1942년 안수산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웨이브(WAVE) 부대의 장교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후 어쩔 수 없이 사병으로 지원하여 해군이 되었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해군에 지원하던 순간부터 해군 생활을 하는 내내 안수산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으나 그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절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는 결혼에서도 미국 사회의 일반적 관행을 앞서 나갔다. 1947년은 미국 대부분 주에서 “인종간결혼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이 유효하던 시대였다. 자신이 살던 버지니아주 역시 인종 간 결혼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음에도 아일랜드계 미국인 커디(Frank Cuddy)와 결혼했다. 당시 군인이었던 그들은 연방법의 적용으로 인종 간 결혼이 가능했던 워싱턴 D.C.의 해군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에 있어서 인종차별적인 법보다 더 큰 난관은 한국의 전통과 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반대 역시 안수산의 결심을 막지는 못했다. 안수산은 결혼에 있어서 한국적 전통이나 관습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 결혼이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프랭크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고, 프랭크에게도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안수산의 이런 긍정적 사고는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적 차별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2015년 6월 23일, 타계하기 하루 전날 마지막 공식 강연에서 안수산은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너희는 성공을 위해 다만 최선을 다하라.” 이 짧은 한마디는 안수산이 인종차별에 맞서 살아온 그의 삶의 방식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2003년 캘리포니아주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된 안수산 여사가 시상식에서 활짝 웃고 있다. ⓒ필립 안 커디
2003년 캘리포니아주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된 안수산 여사가 시상식에서 활짝 웃고 있다. ⓒ필립 안 커디

“나는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조명하는 데 있어 특히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그의 트랜스내셔널리즘적 정체성이다. 안수산이 링크 모의비행 훈련학교를 졸업하는 날 미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안수산을 주목했다. “한국 영웅의 핏줄, 자랑스럽게 웨이브의 대원이 되다”라는 『애틀랜타 컨스티튜션(The Atlanta Constitution)』지의 기사를 필두로 미국의 대다수 언론은 안수산의 배경을 부각하면서 그가 한국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사실과 한국의 적인 일본과 싸우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당시 안수산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서는 그의 트랜스내셔널리즘적인 정체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미국 땅에서 나고 자란 미국 시민이었고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 군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바라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워야 하는 한국인이기도 했다.

안수산의 중첩된 정체성은 은퇴 이후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LA 교민사회에서 ‘미국 한인 이민사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안수산은 늘 자신이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한인 2세대들의 교육에 몰두하면서 아버지 도산의 철학과 자신의 경험담을 전했고 그들이 미국 땅에서 참주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안수산은 마지막 강연도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마무리했다.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러나 한국인의 유산을 잊지 마라”

안수산은 그의 전기작가 존 차(John Cha)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로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그의 솔직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수산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으면서 훌륭한 미국 시민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평생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아버지의 유산을 한인 2세대들에게 전하며 살았다.

안수산은 아시안에게 가혹했던 미국에서 젠더적 편견과 인종적 차별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있어서는 사회적 통념을 개의치 않았고, 보편적이지 않은 길을 과감히 선택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의 용기가 제도적 차별이 없는 진일보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드는 것에 일조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영웅 안수산은 한국인의 핏줄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간직한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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