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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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실린 숙명여학교 맹휴 사건, <동아일보>, 1927. 6. 11 ▶

1927년 어느 날, 한 여학교의 기숙사에는 학생이 집단으로 외박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측에서는 이를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경하게 나왔지만 학부모 위원회의 중재로 외박한 여학생들은 전원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27년 5월 숙명여학교 학생 400명이 일인교사를 배척하는 맹휴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아일보> 5월 27일자에 실린 맹휴 기사를 살펴보자.

…숙명학교는 본래 조선 사람의 경영이었으나 교원을 채용하는 것이나 기타 모든 것에 대하여 일본인이 전부를 좌우하게 되는 까닭에 기숙사 사감까지 일본 여자를 두어 조선 가정의 풍속도 잘 모르는 데에다가 순 일본식으로만 시키려고 조선 재봉에도 일본인 교원이 가르치게 됨으로써 일반 생도들에게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여 전교원 20명 중에 조선 사람은 겨우 5명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인격적 대접도 하지 않는 것 등에 분개하여 그와 같이 휴학을 한 것이라는데, 일반 생도들은 교정에 모여 학교 당국의 책임적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더라.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무주임이 조선인 교사에 대해 심한 차별을 하고 여학생들에게는 민족적 모욕감을 주는 언사를 잘 썼다고 한다. 생활규범, 예의범절을 교육시키는 기숙사의 사감으로 일본인을 임명함으로써 학교에는 일본식 규칙이 일반화되었다. 재봉교사도 일인으로 임명되어 재봉시간에는 기모노 만드는 법을 배웠다. 조선인 교장을 두고는 있었으나 교육방침을 세우고 학교를 경영하는 실권은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조회시간에, 조선인 교장을 일본인 학감과 비교하면서 민족적 차별을 하고 무례한 농을 하여 학생들을 분노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맹휴의 발단이 되었다. 학생들은 부당한 학교처사에 저항하여 1927년 5월 25일에 마침내 ① 제등(齊藤) 교무주임의 사퇴 ② 중도(中島) 사감의 사퇴 ③ 조선인 재봉(裁縫) 선생으로의 개임(改任) ④ 조선인 선생의 채용 증가 ⑤ 인격 선생의 정당한 대우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하였던 것이다.

한 달을 넘어선 맹휴는 신문에 연일 보도되었다. 학교 당국은 맹휴를 반일운동으로 몰아 학생 4∼5명을 주동자라 해서 경찰에 넘기었다. 이로 인하여 학생측의 맹휴결의는 더욱 굳어졌고 학교측에서도 1개월간의 휴교를 단행했다. 이러한 투쟁의 와중에 학생들은 기숙사를 탈출하여 외박을 함으로써 저항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맹휴에 관한 사회의 관심은 다른 학교까지 번져 나갔다. 이들은 학부형과 단합하여 양명회(養明會)를 조직하여 4개월 만에 학생에 대한 큰 희생 없이 학생의 요구 조건을 관철하고 맹휴수습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학생들의 저항의 면모였다.

또한, 이러한 여학생의 맹휴가 대대적인 학생 시위로 번져 나갔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의 행위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이 최고에 달한 가운데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의 몇 학교가 광주 학생 동조 시위운동을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12월 2일 밤 경성여상과 동덕여학교의 운동장에 시위운동을 촉구하는 전단이 살포되었으며 3일부터는 본격적인 서울 여학생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1. 학교는 경찰의 침입을 반대하라.

2. 식민지 교육정책을 철폐하라

3. 광주학생 사건에 대하여 분개하라.

4. 학생 희생자를 석방하라.

5. 조선의 청년 학생이여! 일본의 야만 정책을 반대하라.

6.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이화여고의 최복순을 비롯한 몇몇 여학생의 구속과 더불어 막을 내린 서울 여학생 시위와 여학교 기숙사 학생들의 집단외박은 이러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27년 어느 날 밤에 이루어진 여학생들의 외박은 민족의식, 저항의식, 집단의식을 일깨우는 하나의 계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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