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이의 마음대로 책 읽기] 매일 까마득한 벽 앞에 서는 여성 도배사
[박선이의 마음대로 책 읽기] 매일 까마득한 벽 앞에 서는 여성 도배사
  • 박선이 기자
  • 승인 2021.09.03 12:42
  • 수정 2021-09-04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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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도배사 이야기』배윤슬 지음, 궁리 펴냄
『청년 도배사 이야기』배윤슬 지음, 궁리 펴냄
『청년 도배사 이야기』배윤슬 지음, 궁리 펴냄

강릉에서 쉬며 걸으며 책도 읽으며 여름 한철을 보냈다. 비가 오고 태풍이 불어 바다에는 못 들어갔다. 거친 파도만 간간이 보고 왔다. 강릉에는 대형서점이 없는 대신 작은 독립서점들이 여럿 있다. 서점 주인의 취향과 안목이 반영된 큐레이션 목록이 재미있다. 오프라인 서점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빵집과 카페를 겸한 곳들도 있다. 로컬 맥주 집에서는 추천도서를 사면 맥주 한 잔을 그냥 주는 프로모션을 했고(두 권 사고 두 잔 꽁 술을 마셨다^^) 빵이 책보다 앞 선 곳도 있었다. ‘마음대로 책 읽기’를 위한 책은 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 지앤지오 말글터에서 샀다. 입구를 헷갈려 창고 쪽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지하 한 층에 주제별로 펼쳐놓은 구식 책방 풍경에 마음이 편했다.

명문대를 나와 전공에 맞춰 사회복지사로 취업했던 20대 여성이 2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도배사로 변신했다. 복지 사업의 선별 기준에 공감하기 어려운 일을 겪고 조직 생활의 불합리를 겪은 저자는 “누군가의 삶에 깊이 관여되지 않는 일, 순발력 있게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아나섰고, “누군가에게 크게 피해를 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벽지를 바라보며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일”이라서 도배 일을 택했다.

『청년 도배사 이야기』배윤슬 지음, 궁리 펴냄
『청년 도배사 이야기』배윤슬 지음, 궁리 펴냄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이라고 부제를 단 『청년 도배사 이야기』(배윤슬 지음, 궁리 펴냄)은 좀 어색하게도 ‘마음처방책’으로 큐레이션 되어있었다. “네 잘못이 아냐”류의 달달한 ‘힐링’ 서적을 경원하는 나는 이 책이 마음처방(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이 아니라 한 청년의 생생한 성장기라는 점에 주목했다. 취업, 연애. 결혼, 뭐 하나 만족하게 이뤄지지 않는 청년세대들이 자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라떼이즈 홀스’를 입에 달고 사는 기성 세대가 청년들, 특히 여성 청년들의 속마음과 현실을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주로 신축 아파트 도배 현장을 다니는 저자는 MZ세대가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불만을 갖는 지점을 잘 드러낸다. “너희는 아주 운 좋게 일하는 거야” “ 너희들은 너무 절실함이 없어”라는 말. 저자도 자신의 도배 팀을 이끄는 ‘소장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 “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나 반장님에 대한 경쟁심도 없고 비교하지도 않는다. 동갑내기 동료에게 물었을 때 그도 마찬가지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각자 노력하여 실력을 키우고 좋은 (도배) 방법이 있다면 공유하고 협력하면 되는 것이지 경쟁을 통해 성장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희들은 편하게 일하는 거야”라는 말에도 생각이 다르다. 과거에는 1~2년 귀동냥 눈동냥으로 도배사 보조 일을 해도 ‘우마를 타기(작업대 올라서기)’ 어려웠지만, 요즘은 초보자에게도 빨리 일을 가르쳐준다. 그래야 오야지(작업팀장)에게도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변한 것이다.

저자는 2년 넘게 도배사로 일하며 이제 혼자 작업을 마무리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면서 “벽지가 작업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느낀다. 긴장해서 지나치게 조심하면 벽지는 겁먹은 그를 알아보기라도 하듯 찢어지거나 울었다. 반대로 자신감과 여유가 있는 순간에는 벽지도 착착 붙는다. 그가 깨달은 것은 ‘벽지와 친해지고 익숙해지는 시간’ 꽤 오랫동안,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배, 미장 등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흔히 ‘노가다’라고 부른다. “남자는 힘을 쓰고 여자는 커피를 타야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만연한 곳”이다. 여성이 많은 도배사 직종에서도 ‘젊은’ 여성은 드물다. 근로계약서 한 장 쓰지 않는 현장에서 불합리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직장 내 괴롭힘에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커피를 타거나 뒷정리를 하고 남성은 무거운 쓰레기를 버리거나 짐을 옮기는 성별 분업을 거부한 그는 “적어도 우리 팀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일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이 지속가능하고 안전하게 기술을 접하고 배울 수 있는 협동조합이 ‘남성에게 의존해야 했던’ 부분을 대신해주는 것도 변화의 한 모습이다. “아직 기술자도 아니고 독립하지 못한 일당쟁이 도배사”인 그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벽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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