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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키카테크 대표와 어머니 최미자씨(83세)

 

[나의 엄마 이야기] ⑦ 김지원 키카테크 대표

당신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요. 시간의 원을 돌고 돌다보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엄마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엄마야말로 리더십 에너지의 원천이었고, 어떤 리더보다 더 큰 리더였던 존재였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엄마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설레던 입사 첫 출근 날,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사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되라 하더라. 네가 직원이라 생각하지 말고, 사장이라고 생각하고 사소한 일 중요한 일 가리지 말고 뭐든 필요한 걸 하거라. 그러면 회사가 잘 될 거야.”

“고양이 손?”

사업가의 아내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말씀이 이치에 닿게 들렸던 저는 근무 첫날부터 말씀대로 주위를 둘러보며 필요한 일, 시키는 일 다 찾아서 하였습니다. 컴퓨터 닦는 일부터 커피든 복사든 열심히 하든 몇 년 후, 정신 차려 보니 미스 PPT라는 별명과 함께 주4일 이상 밤을 새우며 팀 내의 중요한 프로젝트에는 웬만하면 제가 다 차출되어 포함되어 있더군요. 돌아보면 어머니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든 평생을 이런 주인 의식을 가지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일제 시절 외할머니 손잡고 남으로 오신 피난민이십니다. 역시 피난민이신 아버지와 늦게 하신 결혼 후 조그만 사업체를 피땀으로 함께 일구셨습니다. 도예 업을 하셨는데, 등에 우리를 업고 밤새도록 뜨거운 가마에 불을 지키시거나, 어린 저와 오빠를 데리고 큰 박스들을 직접 이고 지고 배송을 자주 다니셨습니다. 큰길가 쌓아 둔 박스들에 앉아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박스 지키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진 어머니가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가 영원처럼 길던 그때 제 나이가 세 살. 오빠는 여덟 살. 조그마한 체구의 어머니는 그렇게 뜨거운 열기와 무거운 박스들에 둘러싸여 아버지의 모든 일을 도우셨습니다. 집안에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모시고 살았고, 회사에서는 모든 잡일을 하셨습니다. 전후 생활이 어려운 화가들의 가족도 발로 돌보시면서, 월급날마다 전쟁을 치르셨고, 양가 친척들의 크고 작은 중요한 날엔 우리를 또 둘러업고 달려가서 늘 챙기셨습니다.

우리가 조금 자라고 아파트로 이사한 후로는 주 5일은 집에 손님으로 북적이었습니다. 때는 어음결제 시절이었고, 조용하신 아버지를 보필하여 매일 손님들을 초대해 20첩 반상을 차리시고도 늘 환한 웃음을 보이셨습니다. 해외에서 바이어가 오셔도 집에서 직접 모시며 또 그렇게 헌신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손님을 귀하게 모셔야만 하고 비용을 아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며 그 많은 청소와 요리, 모든 일은 당연히 당신만의 몫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손님들의 즐거운 대화 소리가 공부의 배경음악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그 바쁘셨을 날 중에 간혹 발재봉틀로 우리 자매를 위해 밤새워 만드셨을 얇은 잔 꽃무늬 면 원피스인데, 그 원피스를 입으면 마치 오만과 편견의 자매들이 된 것 같았던 연노랑의 호사스러운 느낌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그 밤의 드르륵드르륵 재봉틀 소리와 어머니의 발짓과 손과 숙인 등이 얼마나 생생하게 기억나는지. 시간 들여 정확히 기억해보면 넉넉함이 없었던 살림살이인데 어머니의 직접 만든 음식들과 직접 만들어 주신, 세상 다른 어디에도 없는 공주님 옷 안에서 우리 자매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충만한 어린 날을 보낸 줄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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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고교시절. 앞줄 제일 오른쪽. 본인제공

어머니께서는 교육에서도 특별함이 있으셨습니다. 독서에 관하여, 제가 어릴 적, 늘 보시던 어머니의 귀한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Architectural Digest)”라는 인테리어잡지를, 커서 출장 갔을 때 서점 가서 몇 권 사서 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책 읽는 습관을 들이고는 싶고, 다른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잡지를 보신 것이었다며 너희가 다 컸으니 이제는 필요 없다며 웃으셨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여느 자매들이 그렇듯 두 살 아래의 동생과 저는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하면서 또 자주 투덕거렸습니다. 5학년 어느 날도 동생과 아옹거리는데, 어머니께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방에 앉히시고 어머니는 우리 앞에 무릎 꿇고 앉으셔서 30㎝ 자를 앞에 놓으시고는 “어른인 내가 어린 너희를 칠 수가 없으니 이걸로 너부터 엄마를 때려라. 자매간 우애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데 아무리 해도 너희에게 알아듣게 못 하는 걸 보니 엄마 자격이 없다.” 기겁하여 어머니께 울며 크게 매달리고는 그 이후 한 번도 어머니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말씨름 좀 할라치면 조마한 마음 안고 일단 어디론가 숨어야 하는데 숨으러 가다가 풀어지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를 키운 것은 어머니의 이런 숭고하신 솔선수범 교육법입니다.

15년간 아프셨던 아버지를 최근 보내신데다, 오랫동안 키우던 반려견도 잃으신 어머니는 요즘 더욱 약해지셨습니다. 아프신 중에도 어머니는 항상 제게 당신보다도 회사 일 먼저 챙기고 직원과 직원 가족 먼저 챙기라고, 당신은 항상 괜찮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감사함을 알아라. 기대하며 살지 말고, 관계에 있어서는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내가 손해 보면 상대방이 즐겁다며 딸이 베푼 이야기를 잘했다며 기뻐해 주시는 어머니. 어머니께 받은 사랑을 밑천으로 세상에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계속 살기 위해 오늘도 노력을 쌓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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