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는 페미니스트였다
도산 안창호는 페미니스트였다
  • 이명화 국가보훈처 연구원
  • 승인 2021.08.13 10:01
  • 수정 2021-08-1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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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공학 ‘점진학교’ 세우고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이끌어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 안창호.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 도산 안창호.

도산 안창호는 한국 근대사의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문화 등 각 방면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역사 인물이다. 그러나 도산을 페미니스트로 주목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도산은 과연 페미니스트인가? 여성을 남성의 부수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당당한 ‘국민’의 일원으로 조국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건설의 비전을 함께 달성해 나갈 동반자로 인식한 점에서 도산은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화의 또 다른 ‘수레바퀴’ 여성

한국이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 사회적 신분이 철폐되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역할이 향상되어 갔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에서 차별당하고 전통적 성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한국 여성들은 가정의 벽을 넘어 험난한 세상으로 걸어 나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한국 여성들 내면에 자리 잡은 인내심과 강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화와 함께 여성들은 수레의 한쪽 바퀴가 되어 역사의 길을 추동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사회는 여성을 세상의 절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여성들을 근대 조국 건설의 신민으로 끌어들여 국민의 의무를 수행토록 한 인물이 도산이다. 

이름 없이 구국운동 뛰어든 여성들

도산은 일찍이 여성도 근대 교육을 받아 구국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고향인 강서로 내려가 관서지방의 첫 남녀공학 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웠다. 여성 교육이 시대의 급무임을 깨달은 것이다. 가사노동에 매여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약혼자 이혜련이 정신여학교로 유학한 것도 도산이 결혼 조건으로 학업을 권유한 때문이었다. 1902년 9월 제중원에서 결혼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길에 올랐을 당시 대한제국으로부터 발급받은 이혜련의 여권에는 ‘이소사’라고만 표기되었다. 남의 부인을 일컫는 ‘소사’가 여성의 이름을 대신한 시대였다. 하지만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도 많은 여성들이 이름 없이 구국운동에 뛰어들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가는 여성들(Korea Review)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가는 여성들. (Korea Review)

여성도 교육 통해 구국운동 참여해야 한다

도산이 별세하기까지 37년간의 결혼생활 중에 부부가 함께 한 시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 시간도 독립운동을 위해 교민들을 만나고 공무를 집행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냈기에 사실 온전히 부부가 함께한 시간은 별로 없었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동안 도산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앞부분은 ‘나의 사랑하는 혜련에게’로 시작했다. 전해지는 일화 중에 도산은 앞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꽃을 심고자 했으나 이혜련은 텃밭을 일구어 자녀들을 먹일 채소를 심고자 하는 의견차로 다투었다고 한다. 이처럼 도산이 전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음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부인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3.1운동 당시 여성의 투쟁을 그린 대한인국민회독립의연금 영수증.
3.1운동 당시 여성의 투쟁을 그린 대한인국민회독립의연금 영수증. ⓒ국립한글박물관

역사 이어간 힘, 여성으로부터

도산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한 한인 여성들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현지에 빠르게 적응하는 생존능력을 지니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는 한편, 영농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집안의 어른을 모시고 자녀들의 교육하는 것을 보고 역사를 이어간 힘은 여성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3조와 5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과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음”을 적시했고 이러한 전통은 대한민국 정부의 제헌헌법에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도산은 국망 이후에 한인들의 국민의식을 결집시키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거대한 한인공동체를 이뤄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수행하고자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좌절된 바 있다. 그러나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으로 국민국가 건설의 과제를 다시 안게 되었다. 봉건적 인습과 식민지 억압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일제 헌병의 총칼에 맨몸으로 맞서 용감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국민 된 책임과 역할을 다함을 보게 된 것이다. 

도산의 지도로 통합을 이룬 미주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17주년 기념(1936)
도산의 지도로 통합을 이룬 미주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17주년 기념 사진(1936)

도산의 권유로 ‘대한애국부인회’ 결성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도산은 미주 각지에서 활동 중인 부인회 소속 여성들에게 광복운동에 하나가 되어 투쟁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이렇게 하여 1919년 8월 5일 통일적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단되었고 각지에 지부를 두었다. 국내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에 의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비롯한 많은 부인회가 새로 결성되었다. 이들 여성 단체들과 연대한 적십자회 조직들은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축으로 하여 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를 이루었다. 한편 3.1운동에 참가한 후에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온 여성들은 도산의 권유를 받아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했고 적십자회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해 독립전쟁에 대비했다. 

여성들에게 12가지 과업 제시

1920년 1월 17일 대한애국부인회가 주최한 ‘고 김경희 여사 추도회’에 참석한 도산은 대한애국부인회와 여성계에 여성들이 실천 수행해 줄 12가지의 과업을 제시한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1) 국내 국외의 여성계가 서로 연락하여 광복사업에 일치 행동하는 일이다. 2) 내외에 있는 남녀동포에게 7가지 주의점을 간단없이 선전 통신하는 일인데 그것은 독립운동 기간이 길어질 것을 각오하고 임시정부의 주의와 성의를 양해토록 할 것. 독립운동의 열렬한 사역자라는 사실을 알리며 각국에서 한국을 동정하고 있음을 선전하고 민간에서 유행하는 요언(謠言)을 분별하여 어리석은 의혹과 상심이 없도록 선전하고 국민개병(國民皆兵)‧국민개납(國民皆納)‧국민개업(國民皆業)의 3대 주의를 널리 알릴 것,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좋은 말들만 전파해 줄 것을 여성계에 요구했다.

3) 임시정부가 사역을 명할 때 가능한 자는 실행하여 국민의 모범이 되어 줄 것과 4) 선전대를 조직하여 중국의 각 단체·교회·학교 등을 순행하며 창가·연설·환등을 이용해 선전할 것과 5) 선전할 자료를 조사하여 정부선전부에 공급하는 일, 6) 광복사업을 하는 근로 인원을 조사하여 노동자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기념품을 보내는 일, 7) 광복사업에 종사하다가 피해 당한 이들의 유족을 조사하여 위로장(慰勞狀)을 보내고 그 집의 어린아이들에게 위로품을 보내는 일, 8) 공역자(公役者)를 초대하여 감사와 격려의 뜻을 표시하는 일, 9) 적십자사 일을 도와주고 가능한 인원은 적십자대에 참가하여 간호법을 연습할 것. 10) 외국인 중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찬성하는 인원을 조사하여 감사장과 기념품 등을 보내는데 여자들의 손수 만든 대한국기‧대한지도 자수화 등과 기타 한국산품을 사용할 것, 11) 여자들은 재정 수입 중에 먼저 20분의 1 혹 30분의 1을 제하며 매일 밥 지을 때에 백미 약간을 제하여 이를 광복사업에 공헌할 것. 12) 이상의 여자들이 각각 진행하는 사건을 부인회에 보고하고 부인회로서는 각인의 행사와 부인회의 사업을 종합 기록하여 매일의 성적을 조사할 것을 여성들에게 요구했다. 

상해 대한적십자회 간호원 양성소(1919)
상해 대한적십자회 간호원 양성소(1919)

여성을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도산이 여성에게 요구한 사안은 오늘날의 젠더 개념에서 보면 보수적인 편이라 말할 수 있다. 도산의 여성관은 결코 남녀차별의 의식에 뿌리 둔 것이 아니며, 일의 중요도에 따른 차이를 둔 것도 아니며 여성과 남성간의 역할 분담을 구분한 것이다. 도산 일기를 보면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여성에게 도산은 육군무관학교 내에 여자대(女子隊)가 만들어질 때를 기다려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한편 여성들을 설득해서 독립전쟁을 함께 준비하며 군인을 모집하고 군인 등록을 하고 명부를 작성하는 일들을 맡겼다. 여성의 섬세한 손길로 수 놓은 태극기를 제작해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해주는 외국인에게 증정하는 일이나 워싱턴·샌프란시스코 등지와 통신해서 미국과 유럽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외국인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조사하고 주선하는 일을 여성에게 맡겨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이혜련이 임시정부에 전력하는 남편 안창호에게 보낸 가족 사진.
이혜련이 임시정부에 전력하는 남편 안창호에게 보낸 가족 사진.

정파 초월해 임시정부 맥 이어

도산은 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 여성의 힘과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통일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이끈 사람이다. 도산이 여성에게 요구했던 과업들은 독립운동의 뿌리와 줄기가 튼튼히 성장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국 여성은 남성들이 헤게모니 쟁탈과 좌우진영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주의와 정파를 초월해 중심을 잡아가며 임시정부 지원의 맥을 꾸준히 이어갔다. 도산은 여성들이 국민의 일원으로서 남성과 연대하여 나라 독립의 책임을 다하도록 배려하고 격려함으로써 페미니즘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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