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첫사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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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하교길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는 남학생, 도서관(혹은 독서실)에서 나눈 말 몇 마디, 그림 엽서를 보내고 매일 밤 가슴 졸이며 듣는 라디오…. <말죽거리 잔혹사>는 당신이 거쳐왔고 누군가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사춘기의 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곳에는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도시락이나 첫사랑의 찢어질 듯한 두근거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과 함께 교문 앞의 배지검사와 구타, “대학에 못 갈 거면 공장에나 가라”는 폭언, 우열반 나누기, 패거리 의식(요즘 말로 하면 왕따 현상)도 함께 뒤섞여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연애와 결혼에 대해 도전장을 던진 시인 출신의 감독 유하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우리를 1978년 강남의 한 신생 고등학교로 데려간다. 유신 말기, 군복 입은 교련 선생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그곳에는 이소룡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에게서 너무나 사랑받았으나 그만큼 빨리 사라져버린 이소룡은 사춘기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인상을 남기고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권상우와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이정진이라는 두 얼짱 겸 몸짱을 한꺼번에 만나는 재미도 톡톡하다. 특히 권상우는 어깨를 움츠리고 눈물을 글썽이는 소심한 사춘기 소년을 가슴 저리게 연기한다. 그가 이소룡을 좇아 근육맨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관객들이 자지러진다. 드라마 <노란 손수건>에 출연했던 한가인도 별 내숭 없이 70년대 여고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애마부인 3>의 80년대 에로스타 김부선이 보여준 떡볶이집 아줌마 캐릭터는 낡은 것으로 보인다. 한가인이 연기한 은주라는 여학생도 단면적이다. 그렇지만 뭐, 이 영화는 어느 사춘기 시절에 대한 기억과 환상의 조합이니까. 그 소년이 그녀들의 모든 것을 이해했으리라 믿는 게 무리일 수도 있겠다.

결국 <말죽거리 잔혹사>는 풋풋한 사춘기를 끔찍하게 부숴버리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이소룡적 괴성이다. 사춘기가 따뜻할수록 그들을 괴롭히는 기제는 잔인해진다. 따라서 권상우가 쌍절곤을 휘두르며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라는 일갈은 충격이고 감동이다. 내가 갔던 일반 관객 대상 시사회에서 한 관객은 권상우의 이 대사에“화이팅!”을 외쳤다. 영화관람에 방해가 됐을지도 모를 느닷없는 외침에 다른 관객들은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사춘기를 학교라는 잔혹한 공간에 버려두고 온 것이다.

최예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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