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W초대석] 한규범 한일프라콘(주) 회장

문익점 목화씨 덕에 따뜻한 옷· 이불 가능했듯
생수 담는 페트병 내놔 수명 100세 시대 열어
30여년 전부터 플라스틱 재활용 중요성 강조해
페트병 압축기계· 분쇄기 개발해 지자체에 공급
‘2020년 대한민국 중소벤처기업대상’ 수상
'제18회 서울대AMP대상'도 받아

한규범 회장
한규범 회장

한규범 한일프라콘(주) 회장은 창업 1세대다. 한일프라콘의 전신인 금성캡공업사를 시작한 게 1964년이니까 사업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회사의 실무를 아들에게 넘겨준 지금도 매일 출근한다는 그는 “평생 곁눈질 안하고 한우물만 팠더니 사업을 크게 키우진 못했지만 일하는 건 여전히 즐겁고 보람 있다”고 말했다.

한 회장의 일생은 역경과 도전, 연구와 개발, 인내와 성실의 연속이었다. 일본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겪고, 국민 대다수가 배고픔에 시달리던 보릿고개를 경험했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1200달러에 불과했던 산업화시대 초기 제조업에 뛰어든 그가 가진 것이라곤 절실함과 뭐든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원칙 뿐이었다. 그런 절박함과 신의성실 고수의 원칙으로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기술력을 확보, 한일프라콘이라는 강소기업을 일궈 냈다.

한일프라콘은 PE(폴리에틸렌)와 PET(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 기반의 포장용 용기 제조업체다. 본사는 충청남도 천안에 있고, 안성· 동탄 등에 공장을 두고 있다. 위생과 기술, 신의를 최우선시하는 한 회장의 경영철학으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과 수십년 간 동반자 관계를 이룩하면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봉급쟁이였던 그가 독립한 건 우연이었다. 병마개 사업을 하던 친척이 어느 날 달랑 기계 한 대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친척의 요청으로 일을 돕던 그는 거래처에 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솔직한 그에게서 성실함이 묻어났을까. 거래처에선 계속 주문하겠다며 함께 일하자고 했다. 사출기계를 들여오고 플라스틱에 대해 파고 들었다.

식용유 출시한단 말에 페트병 고안

페트(PET)병을 처음 개발한 건 1979년.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인천 연안부두에 식용유 공장을 짓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그는 기존의 폴리에틸렌(PE)이 아닌 다른 재질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트병 대중화의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전광석화처럼 머리에 페트가 떠올랐어요. 당시 국내에서 페트는 생소한 재료였죠. 일본에서도 개발이 안됐었구요. 저는 플라스틱 관련 문헌을 통해 알고 있었던 데다 듀퐁사에서 만들어 펩시콜라에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었어요. 이 회장님을 설득했지요. 경쟁업체를 이기려면 다른 수를 써야 한다구요.”

삼성 쪽에선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요한 신제품을 시판하는데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의 용기를 내놓겠다니 걱정이 태산일 수밖에. 결국 절반은 기존의 PE로 하고, 나머지 절반만 PET로 하기로 했다. 불은 발등에 떨어지고. 한 회장은 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직원들과 함께 머리를 싸매고 밤을 새웠다. 기계와 원료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다.

시행착오 끝에 국내 최초의 PET병을 내놓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깨끗하고 투명한 페트병에 담긴 노란 식용유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쟁업체가 내놓은 PE병은 불투명한데다 미세하나마 요철이 있어 매대에 놓으면 뿌연 먼지가 앉았다. “깨끗해요 고소해요”라는 김혜자 씨의 광고가 등장했다. 1979년이었다.

한규범 한일프라콘 회장 ⓒ한일프라콘
한규범 한일프라콘 회장 ⓒ한일프라콘

'"깨끗해요 고소해요" 광고 등장

식용유에 이어 간장 병도 페트로 내놓았다. 다음은 생수(맑은샘물) 용이었다. 생수병은 가볍고 위생적이고 무엇보다 값이 싸야 했다. 물은 공짜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던 시절 용기가 비싸면 판매가 불가능할 터였다.

PE병은 두껍고 무거웠다. 공기투과율이 높은데다 원가도 비쌌다. 페트병은 가볍고 투명하고 공기투과도 안돼 생수용으로 제격이었다. 페트병 덕에 온 국민이 물을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몸의 70%는 물로 이뤄져 있다잖아요. 몸 속 수분이 3~4%만 부족해도 어지럼증· 피로감· 변비· 탈모· 노화 등 갖가지 증상이 생긴다고 합니다. 혈액의 농도가 진해져 혈류량도 급감하게 되구요. 그런데도 예전엔 식사 때 말곤 물을 먹을 수 없었지요. 페트병으로 휴대용 생수를 공급할 수 있게 만들어 국민 건강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페트병 정착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식용유병으로 공전의 빅히트를 쳤는데도 식품업계에선 페트병 사용에 대해 계속 반신반의하며 망설였다. 간장 판매로 유명한 업체에선 유리병을 고집했다. 병을 회수해서 재활용할 수 있으니 싸게 먹힌다는 이유였다.

“유리병은 무겁고 부피도 크잖아요. 게다가 당시엔 양잿물로 세척했으니 물을 오염시키구요. 지금도 생각납니다. 남성들이 비닐 앞치마를 입고 양잿물로 유리병을 닦던 일이요. 페트병은 가벼우니 운송하기 쉽고 운임도 덜 든다고 설득했어요. 알고 있는 것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라는 점도 강조했지요.”

애써 개발했더니 중소기업 고유업종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대기업이 뛰어 들었다. 이래저래 어렵지만 한 회장이 가장 속 상한 점은 페트가 환경오염 주범으로 몰리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그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 중심으로 ‘페트병 사용금지에 관한 공청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공청회가 계속되면 페트병 자체가 사용 금지 될 판이었다.

페트 재활용 강조해 사용금지 막아

“공청회가 열리는 프레스센터로 뛰어갔어요. 페트 재활용에 관한 자료를 배포하고 발언권을 얻어 외쳤어요. ‘페트가 얼마나 재활용하기 좋은 소재인데 금지시키겠다는 거냐. 옷도 만들 수 있고, 정히 안되면 연료로 쓸 수 있다. 버릴 게 없는 게 페트다’라고요. 참가자들 사이에 박수가 터져 나오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페트를 못쓰게 하려던 걸 막았어요.”

30여년 전에 페트를 비롯한 재활용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주장하고 환경문제 해결에도 앞장선 셈이다. 말로만 한 게 아니었다. 한 회장은 1992년 설립된 (사)한국PET용기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아 페트병 재활용에 힘을 기울였다. 페트의 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한 건 물론 재활용에 필요한 기계를 개발하고 홍보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페트를 재활용하려면 분쇄하기 위해 공장에 가져가야 하는데 부피가 크니 운임이 많이 들어요. 잘 찌그러뜨려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구멍을 뚫어 부피를 줄이는 압축기를 만들어 구청 등 지자체에 기증했어요. 페트는 또 얇고 질겨 떡처럼 뭉치는 바람에 분쇄가 잘 안됐어요. 분쇄기를 개량해 문제를 해결했지요.”

그래도 국내의 재생기술이 부족해 버리거나 중국에 수출하는 바람에 국내에서 재생할 새도 없이 중국에서 몽땅 쓸어갔다. 최근엔 페트를 비롯한 플라스틱 재활용이 관련업계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 회장이 30여년 전에 그토록 강조한 얘기를 이제야 여기저기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한 회장은 평생 욕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페트병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곤 기술 독점을 위해 특허를 내긴커녕 서울 여의도전시장에서 전시했다. 기계도 마찬가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즉시 외부에 알렸다. 혼자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좋은 기술, 좋은 제품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들여온 덕에 온 백성이 따뜻한 옷을 입고 포근한 이불을 덮게 됐지요. 무엇보다 서민들이 헐벗음에서 벗어났어요. 새마을운동과 통일벼 덕에 보릿고개는 면했지만 물은 밥 먹을 때 외엔 먹을 수가 없었잖아요. 너나 할 것 없이 만성적인 물 부족 상태로 살았던 셈이지요. 비록 작은 것이지만 페트병을 개발해 우리 국민의 건강 증진과 100세 시대 개막에 기여한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한 회장은 사업에 매진하는 한편 서울대에 발전기금을 기부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등 사회 공헌에도 힘썼다. 이런 공로로 2019년 '제18회 서울대AMP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20년엔 대한민국 중소벤처기업 대상(경영혁신 부문)을 받았다.  페트병의 대중화와 재활용 모두에서 선구자 역할을 해온 한규범 회장. 창업 1세대로 온갖 역경을 소신과 의지, 도전과 신뢰로 극복해온 그의 얼굴은 지금도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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