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아내

이용숙/ 음악칼럼니스트

오페라 공연에 늘 남성보다 여성관객이 많은 이유는 스토리의 상당수가 여성이 겪는 비극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를 관람하는 부부나 연인들을 유심히 보면, 여자가 극에 몰입해 진지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동안 남자는 꾸벅꾸벅 졸거나 몹시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보는 오페라가 하나 있는데, 바로 베토벤의 <피델리오Fidelio>다. 남자들이 이 오페라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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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을 한 레오노레(힐데가르트 베렌스)가 남편의 원수 피차로에게 총을 겨누는 모습. 남편 플로레스탄(르네 콜로)이 아내를 말리고 있다. 1992년 빈 국립오페라 극장 공연.▶

첫째, 정치를 소재로 한 오페라여서. 둘째, 착하고 강인한 아내가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해내는 헌신과 감동의 드라마여서. 셋째, 베르디나 푸치니가 아닌 베토벤의 작품이어서. 그러니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음악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오페라 공연에 함께 가는 걸 귀찮아할 경우에는 <피델리오> CD나 DVD를 사서 들려주거나 보여주면 좋다. 그러면 통속적인 사랑타령 일색인 줄 알았던 오페라에도 이처럼 정치적인 소재와 장중한 음악과 숭고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걸 알고 오페라에 호감을 갖게 되기가 쉽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 조반니>마저도 내가 보기엔 너무나 부도덕하고 속된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결코 그런 소재로 오페라를 만들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렇게 말한 베토벤은 자신의 인생관과 취향에 맞는 '고상한' 오페라 소재를 구하려고 수없이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아낸 것이 <레오노레 혹은 부부애>라는 프랑스 오페라 대본으로, 베토벤은 이 작품을 독일어로 각색해 작곡한 뒤, 제목을 <피델리오>라고 붙였는데, 이 작품은 결국 소재 고르기에 유난히 까다로웠던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가 되었다.

'신의'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에서 따온 이 제목은 여주인공 레오노레가 남장을 할 때 사용하는 가명. 프랑스 대혁명기 공포정치하의 실제 에피소드를 소재로 했으나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건의 배경을 스페인으로 옮겨놓은 이 이야기에서, 레오노레는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펼치다가 정치범으로 지하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려고 남장을 하고 그 감옥의 간수와 딸에게 접근한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간수의 딸이 이 '피델리오'를 진짜 남자로 알고 사랑에 빠지는 등 난처한 사건들도 벌어지지만, 남편 플로레스탄에 대한 신의와 사랑으로 무장한 레오노레는 플로레스탄을 감금했던 악랄한 정적(政敵) 피차로를 결국 법의 심판에 넘기고 남편을 구해낸다. 피차로가 플로레스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기 직전에 얻어낸 극적인 승리였다.

간수 보조로 위장취업해 힘든 육체노동을 감내할 뿐 아니라 고문으로 일그러진 남편의 처참한 몰골을 지켜보고 그의 철천지원수를 대면해야 하는 심리적 충격을 모두 감당해야 했던 레오노레. 모든 오페라를 통틀어 가장 용감하고 멋진 여주인공이지만,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과 고통을 끊임없이 독백으로 털어놓는 인간적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델리오>는 이 세상 곳곳에서 어디론가 끌려가 갇히고 고문당하고 인권을 짓밟힌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 오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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