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인 1950년 8월 31일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중이던 해병대가 제주도에서 해병대를 모집할 당시 해병 4기로 여자의용군 126명이 자원입대한 모습. ⓒ해군
6.25전쟁 중인 1950년 8월 31일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중이던 해병대가 제주도에서 해병대를 모집할 당시 해병 4기로 여자의용군 126명이 자원입대한 모습. ⓒ해군

6월은 괜스레 달뜨는 달이다. 상반기를 마무리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 같은 뜨거운 여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하염없는 ‘슬픔 절기’ 다. 제2연평해전의 유가족들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보다 먼저, 6월은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다. 우리 정부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무려 두 달 동안 최후방인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갔다. 그해 여름은 정말이지 덥고도 비참한 정서를 품고 있었다.

흔히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문득 궁금하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처럼 고향에서 국밥을 팔며 전쟁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강인하나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여성과 간호장교로 봉사했던 여성 외에 전투전력으로서의 여성은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6·25 전쟁은 전 국민이 동원되는 총력전 양상이었고, 군인과 민간인이 차별 없이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시기, '포화속으로' 몸소 걸어들어간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최초의 여성장교, 여성의용군, 그리고 무명용사로 참전했다. 당시 여군은 주로 정훈활동, 심리전, 적군의 병력 파악, 첩보 활동과 함께 직접 총기를 들고 적군을 공격하는 임무까지 수행했다. 그리고 수많은 여군들이 산화했다.

여군장교의 모태는 1949년 여학교 학도호국단 훈련을 위한 훈육장교로서의 여자배속장교 창설이었다. 모집대상은 체육과 여학생,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청년, 여성 체육 교사가 주 대상이었다. 배속장교로 선발된 32명의 여성들은 지휘통솔법, 독도법(讀圖法), 총검술, 총기 분해결합, 각개전투, 분·소대 전술 등을 훈련받았다. 이들 모두가 전원 수료해 49년 7월 30일부로 육군 예비역 소위로 임관, 후일 6·25 여군참전을 지휘하게 된다.

특히 최초의 여성장교이자 여군창설자인 김현숙은 신성모 국방장관실에 보직되 지리산 무장공비 진압 작전중 6·25를 맞는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병역의 의무가 없는 어린 남학생들이 군에 자원하는 것을 보고 채병덕 참모총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하여 승인받는다. 대한민국 여군 모태의 자발성이다.

여자의용군은 500명 선발에 1,500명이 몰리는 등 계획된 것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응시했다. 모집대상은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자', '신체 건강한 자'였고 특히 신체시험이 엄격했다고 한다. 이 의용군은 육군뿐 아니라 해병대, 해군, 공군에서도 모집됐다.

여자의용군은 특히 정훈병과에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전방 및 후방에서 대북 심리전을 전개하는 한편 국군 점령지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계몽 교육을 펼쳤다. 이중 김명자 소위는 적군 점령지 상공에 홀로 경비행기를 타고 가서 투항 권유전단을 살포했다. 인민군의 총격에 밎서 목숨 걸고 심리전을 펼친 것이다.

전투병과로 지원한 여군은 주로 전방에서 적군의 병력을 파악하고 참모를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특히 전쟁이 38선 부근에서 고착화 됐을 당시, 즉 낮에는 공격하고 밤에는 후퇴하던 식의 고지전 상황에서 이복순은 ‘목숨 걸고 참호에서 문서를 사수하라’라는 명을 받고 임무에 임하던 중 후퇴하는 아군 차량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다. 작전 당시 몸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보훈처가 유공자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또 의사들은 “6.25와 여자가 척추 다친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핀잔을 줬다고도 한다. 구시대적 여성인식의 한계였다.

한편 정보병과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여군이 있었던 듯하다. 김광자 라는 여성이다. 그는 첩보대원으로 활약하던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직접 표창을 수여 받았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공적을 세웠는지는 기록이 없다.

이렇게 군으로 정식 입대한 여성들 외에 여성학도병이 있었다. 학도병 금숙희는 팔공산에서 무장공비 45명을 국군으로 귀순시키기도 했다. 또 민간인 여학생들이 공산군 점령지에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공산주의 이념의 잔혹함에 대해 선전활동을 벌이다가 학살당하는가 하면, 게릴라 형식으로 소규모 전투에 참전한 여학생들도 있었다.

당시 유일한 엘리트조직으로서 군은 사회에 진출할 인재들을 길러내는 기관의 역할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군에서 활약했던 여성들이 산업화 시기에도 사회 곳곳에서 리더로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녀들의 후대로서,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당시 여성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으로 자원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여름이 됐으면 좋겠다. 가부장제의 잔재하에서 남성들에게 차별만 당한 역사가 아닌, 적극적으로 여성들이 이 나라에서의 설 자리를 늘려온 역사로서 대한민국 여성사의 출발선을 재설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명 서울시의원
여명 서울시의원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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