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살다 보니 주위가 온통 가방 끈 긴 여자들로 만원이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들 공부를 참 많이들 했다. 전업주부로 살 때는 박사학위 받은 여자들은 희귀종이 아닌가 싶더니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많은 부모들이 아들만 아니라 딸도 박사로 만들고 싶어하고 하루가 다르게 여자박사들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요컨대 그들이 너무 엘리트연하고 건방지고 현실을 모르며 몰라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그 잘난 여자들과 밸 꼴려서 어떻게 함께 지내냐, 너도 학위 하나 따지 그러냐고 노골적으로 찌르기도 하지만 난 아픈 걸 별로 못 느낀다. 박사친구들과 함께 일하고 노는 데 아무 지장이 없기도 하려니와 나 자신은 박사공부를 할 정도로까지는 공부에 적성이 안 맞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한 우물을 파기보다는 사소한 유혹에 빠지길 더 즐기는 취향의 소유자가 어떻게 공부를 하겠느냐는 게 내 솔직한 고백이다(물론 공부도 잘하고 죽여주게 놀 줄 아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엄청난 복이라니! 내겐 가당찮다).

가방 끈 긴 여자의 컴플렉스도 있다

게다가 그들은 엘리트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난 여자들이다. 잘난 여자들과 지내면 돈 안 내고도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왜 밸이 꼴리나(당사자들이 들으면 꽤나 민망해 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방끈이 짧은 여자라고 억지 겸손을 부리려는 건 아니다. 내 세대에 대학원까지 다녔다면 가방 끈이 만리장성이라고 해도 좋을 게다.

그리고 또, 가방 끈 긴 여자들을 잘난 여자들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럼 나보다 가방 끈 짧은 여자들은 못난 여자들이냐고 조급히 트집걸어 오지 말길 바란다. 오늘 내가 가방 끈 이야기로 말문을 연 건 가방 끈 짧은 여자들한테 한 수 배우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지 다른 뜻이 아니다.

얼마 전 농촌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농사지으랴 살림하랴 시어머니 모시랴 손발이 닳도록 고단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21세기가 어떻고 여성성이 어떻고 떠들려니 스스로 빈 깡통 같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편치 않았다. 상대적으로 가방 끈 긴 여자의 콤플렉스라고 할까.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밥을 먹는 자리에서 바로 옆자리의 여성이 내 무릎을 철썩 치면서(아이쿠, 얼마나 아팠던지!) 말을 걸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투박한 손이 그가 살아온 지난날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중요한 건 가방 끈 아니야 가방 속이지

“아이구, 듣다 보니 댁은 나하고 같은 쉰 여덟 개띤데 그 시절에 어떻게 공부할 생각을 다 했수, 난 국민학교만 나오고 단데. 내 동갑이 이렇게 훌륭하게 됐으니 내 마음이 아주 좋수.”

말과 행동이 그럴 수 없이 당당하고 또 친근했다. 가방 끈이고 뭐고 이 땅에서 동시대를 살아온 5학년 여학생끼리의 교감이 둘 사이에 넘쳐 흐르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최근엔 가방 끈 짧은 40대 엄마가 혼자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책으로(그것도 두 번째나) 펴낸다고 해서 추천사를 쓴 적이 있다. 원고를 읽어갈수록 중학교만 나온 여자가 이렇게 사려깊고 지혜롭게 살아가고 그걸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동시에 내가 가방 끈 짧은 사람에 대해서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 속으론 얼마나 편견을 갖고 있었던가 새삼 부끄러웠다. 그 여성은 올해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난 그이가 단지 가방 끈을 늘이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젠 또 다른 가방 끈 짧은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가끔씩 이렇게 전화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장시간 털어놓곤 하는데 웬만한 시사평론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통찰력이 느껴진다.

소위 일류대학을 다니는 자신의 아들이 점점 나쁜 쪽으로 변하는 것 같다는 것이 어제의 주제였다. 남에 대한 배려가 줄고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변하는 걸 보니 우리 교육이 하루 빨리 인성교육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의례적인 토론회에서 보듯 그저 듣기 좋은 말, 하기 좋은 말이 아니라 세상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평소에 늘 가방 끈 길이로 사람을 재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는 그는 어제도 '가방 끈 짧은 여자가 또 잘난 체했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난 얼른 덧붙였다.

“가방 끈은 짧아도 그 가방 속에는 책이 가득하잖아요.”

아무렴, 중요한 건 가방 끈이 아니고 가방 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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