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원/ 문학평론가

'우리 할머니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연재를 시작한다. 1900년을 전후하는 근대는 신문물이 봇물처럼 들어오던 시기였다. 당시 여성들은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역사책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들의 생생한 삶을 여성신문 지면으로 끌어왔다. <편집자 주>

~b8-2.jpg

◀손탁호텔 전경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사장은 여성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는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요리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개항은 조선 식민화의 결정적 계기이자 서양식 생활문화가 일상으로 유입되는 계기이다. 여성들의 일상생활도 이와 더불어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독립신문>에 실린 요리서의 광고를 보면 이 시기 일상에 침투한 서양 문물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셔양음식 만드는 법을 국문으로 번역하야 본샤에셔 박혀 파는데 영국과 미국에서 쓰는 각종 식물 이백칠십일 종류를 만드는 법을 자셔히 번역하얏는지라. 서양 식물만들기에 유의하난 사람들 의게 매우 긴요하고 유익한 책이오니 첨군자는 사가시압. 갑슨 오십전식이오.

<독립신문>1899. 12. 4

이처럼 영국, 미국 식물 조리법을 소개하는 책이 번역되어 나올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리가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고 소수 상류층을 대상으로 판매, 소비되었다.

궁중에서는 국가의 외국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서양요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 데, 1900년 6월 12일자 <황성신문>을 보면 독일부인 '송씨'를 궁내부 요리사로 채용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송씨란 손탁호텔을 세운 손탁 여사를 말하는 것 같다. 손탁은 독일 여성으로 1885년 초대 한국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와 함께 서울에 도착해 궁궐에 들어가 양식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했다.

1902년 10월에는 고종에게 하사받은 정동 가옥을 헐고 2층의 서양식 호텔을 지었는데, 이 호텔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최초의 호텔 탄생이자 여성 호텔주인의 탄생이다. 손탁호텔은 고관대작의 회의와 연회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 고종 말년 궁중 수랏간에는 서양요리 주방이 따로 마련되어 일주일에 몇 번씩 서양요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커피·홍차 등의 서양 차와 함께 케이크도 간식으로 자주 애용되었다. 여담이지만 고종은 서양식을 즐겼다고 하며, 영국 유학생 윤기익을 궁중의 양식 책임자로 앉히고, 이에 필요한 집기와 서양요리책도 사들였으며, 프랑스에서 일류 요리사를 초빙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 호텔의 사장이 여성이었던 것, 그러나 조선 여성이 아니라 독일 여성이었던 사정은 이와 같다.

서구 식품의 유입은 서민들의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진에서 보이는 소반 위의 양주병은 서양 음식이 일상에 파고 든 현실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화는 식문화의 기계화와 상업화도 이끌었던바, 국수판매와 빵장사, 중국요리점, 요정 등의 음식점이 열린 것도 이 시기와 더불어서다.

국수의 경우를 보자. 조선시대에는 국수집에서 국수틀로 만든 국수를 싸리 채반에 담아 판매했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에는 회전압력식 국수틀이 개발되어 오늘날과 같은 건조밀국수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삼성상회의 별표국수는 인기가 높아서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처럼 개항과 더불어 서구의 일상생활문화는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고 여성들의 생활문화도 바뀌었다. 양복, 양동이, 양은, 양화, 양장, 양잿물, 양옥, 양철, 양말 등 서양을 상징하는 양(洋)을 사용하는 접두사는 밀려들어온 서구문화와 우리의 일상문화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개항, 근대화 과정은 대다수의 서민여성을 절대빈곤의 상태로 몰아갔지만 여성들로 하여금 신식 물건의 편리함과 세련됨에 감탄하게 했다. 그때나 이때나 제 주머니의 돈을 빼가는 도둑이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리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참고자료 http://hanbat.chungnam.ac.kr/~phistory/lifestyle/index/food.htm

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