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령 서울시유니버설디자인센터장

최령 유니버셜디자인 센터장 ⓒ홍수형 기자
11일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최령 유니버셜디자인 센터장 ⓒ홍수형 기자

서울엔 최근 호텔 부럽지 않은 주민센터 화장실이 생겼다. 6월 초 리모델링을 마친 서울시 양천구 신정3동, 서울 구로구 구로2동 주민센터 화장실이다. 벽에 큰 픽토그램(그림문자)을 붙여 멀리서도 찾기 쉽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과 안내판은 기본. 위생을 고려해 발로 버튼을 눌러 화장실 문을 열 수 있게 했다. 남자 화장실에도 유아 의자와 기저귀 교환대가 설치됐다. 아이가 춥지 않도록 기저귀 교환대 밑에 열선을 깔았다. 유아차 보관장소도 따로 마련했다.

이 ‘디자인 복지’ 사업을 이끄는 곳이 서울시유니버설디자인센터다. 2020년 6월 문을 연 서울시 산하 전문기관이다. 직원은 8명. 노인·아동 복지, 공간 디자인, 장애 인권 등 다양한 분야의 소수정예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6월 초 유니버설 디자인 관점으로 리모델링을 마친 서울 구로구 구로2동 주민센터 남자화장실. ⓒ서울특별시유니버설디자인센터 유튜브 캡처
6월 초 유니버설 디자인 관점으로 리모델링을 마친 서울 구로구 구로2동 주민센터 남자화장실. ⓒ서울특별시유니버설디자인센터 유튜브 캡처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문턱을 없애고, 통로 폭을 넓히고, 눈높이를 맞추면 됩니다. ‘한 끗 차이’로 삶의 질이 달라지죠. 노인, 여성, 이주민, 장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도시 공간을 만들고 행복하게 공존할 방법을 찾자는 겁니다. 우리 세금으로 만든 공간이니 우리 다 같이 누려야죠.”

최령 서울시유니버설디자인센터장의 말이다. 그는 한국의 ‘유니버설 디자인 전도사’로 불린다. ‘초고령 사회’ 일본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을 기초로 한 주거환경 분야를 전공하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주거 환경 개선 프로젝트와 연구 경험을 쌓아온 전문가다.

최 센터장은 유니버설 디자인은 ‘역차별’, ‘비효율’이라는 선입관은 단호히 거부했다. “길게 보면 훨씬 효율적”이라면서, 사소한 디자인이 어떻게 일상을 바꾸고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려줬다.

“우린 결국 늙고 병들어 약자가 될 운명...
안전한 미래 고민하는 게 유니버설디자인”

도시는 불편투성이다. 유아차나 휠체어를 끌고, 지팡이를 짚고, 하이힐을 신고 다녀 본 사람은 안다. 아기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아빠, 구두 굽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 발목을 삐끗했던 여성, 아픈 다리로 계단을 오르는 노인, 깨진 점자블록에 의존해야 하는 시각장애인...

최 센터장도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문제다. “혼자서는 아기를 데리고 외출할 엄두도 못 냈어요. 20년이 흘러도 변화는 더뎌요. 엄마든 아빠든 아이 둘을 안고 갈 수 있는 공중화장실부터 만들어놓고 애를 낳으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유니버설 디자인은 장애인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은 “오해”라고 잘라 말했다.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겁니다. 우리 모두 결국 나이 들고 약자가 되잖아요. 지금은 나이 드는 게 별거냐 싶어도, 언젠가 큰 산처럼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있어요. 저출생·고령화 시대에는 유니버설 디자인이 더 중요합니다. 개인이 스스로의 돌봄과 안전을 책임지는 구조에서, 지역사회가 돌봄과 안전을 제공하는 구조로 나아가야죠.”

“한국인의 집·직장·휴게시설 대부분은
노인·장애인·유아차 고려 없이 설계됐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기존 디자인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효율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지적도 반박했다. “관점을 바꿔볼까요. 좋은 것, 오래가는 것은 그만큼 비용이 듭니다. 우리는 그 비용을 지불한 적 없어요. 대신 ‘빨리빨리’, 효율 만능주의를 택했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집, 일하고 쉬는 건물·시설 대부분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노인, 장애인, 유아차 등을 ‘사용자’로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 결과 일어나는 수많은 안전사고와 불편은 누구의 탓인가요?

건물을 지으면서부터 계단과 경사로를 모두 설치한다면 초기비용은 조금 더 들겠죠.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물이 될 것이고, 그래서 개보수 필요성도 낮아지죠. 해외 사례를 봐도 유니버설 디자인을 제대로 적용해서 만든 건축물·시설물의 감가상각이 오히려 낮습니다. 한국은 벌써 늦었어요. 일찍부터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극 도입한 일본, 미국은 물론이고 노르웨이, 아일랜드, 싱가폴 등은 이미 효과를 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도 제대로 시작한다면, 5~10년 뒤에는 분명한 효과가 드러날 거라고 봅니다.”

최령 유니버셜디자인 센터장 ⓒ홍수형 기자
11일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최령 유니버셜디자인 센터장 ⓒ홍수형 기자

좋은 디자인이 갖는 ‘공감과 치유의 힘’

유니버설 디자인 요소는 이미 일상 곳곳에 있다. 최 센터장은 인터뷰 장소인 DDP 살림터 도서관 출입구 유리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투명한 유리 벽에 한 줄을 그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여기 벽이 있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죠. 같은 공간도 이렇게 사소한 변화로 사람들의 행동과 습관을 바꿀 수 있어요.”

‘경로당을 스타벅스처럼 만들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도 내놨다. “농촌 경로당은 구조부터 아주 폐쇄적이에요. 장판 깔린 바닥에 모여 앉는데, 내부 서열에 따라 어디에 어떻게 앉느냐가 정해져 있죠. 의자만 놓아도 달라질 수 있어요. 깨끗하고 편리하게, 스타벅스처럼, 누구나 편하게 와서 차 마시면서 얘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개조한다면? 디자인의 힘으로 뻔하다고 생각했던 공간도 ‘공감과 치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요. ‘대충대충’, ‘빨리빨리’ 대량공급 시대에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지만 이제 바꿔야죠.”

최 센터장은 강조했다. “디자인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어요. 건축가나 공간 디자이너라면 꼭 알아야 해요. 이제 유니버설 디자인이 서울시를 넘어 한국의 표준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약자가 될 운명인데, 약자를 고려하지 않은 공간을 짓고 살아간다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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