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없이 한끼 먹을 만큼 제철 나물로 차린 소박한 밥상. ⓒ박효신
냉장고 없이 한 끼 먹을 만큼 제철 나물로 차린 소박한 밥상. ⓒ박효신

멀쩡하던 냉장고가 갑자기 멈춰 버렸다. 냉장고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그 원인을 찾아 킁킁거리다가 냉동실을 열어 보고서야 냉장고가 고장 난 것을 알게 되었다. 냉동실 안은 출렁출렁 물이 고여 있었다. 호박 스프를 만드려고 잘 다듬어서 1회 분량으로 비닐 팩에 가득 담아놓았던 호박이 완전히 녹아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냄새는 이미 상하기 시작한 호박에서 나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냉장고가 안에 불도 켜져 있고, 돌아가는 소리도 나는데 왜 안 되는 거지?”

그나저나 큰일 났다. 토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AS센터는 일요일은 쉴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월요일까지 냉장고를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냉장고 안에 저것들을 다 어쩐다?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게 어제부터이니까 멈춘 지는 이틀 정도 되었다는 이야기다. 냉장고 안에 불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일단 냉장고 속의 것들을 다 꺼내어 밖으로 내놓기로 했다. 밀폐 용기에 담아 두었던 것들을 일일이 열어 보니 이미 상한 것들도 많았다. 상한 것은 과감히 버려 가며 밖으로 내놓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도대체 뭐가 이리 많은 겨? 꺼내어도 꺼내어도 끝이 없네.”

냉장고 안에 든 것들을 모조리 꺼내 놓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난 냉장고에 그렇게 많은 것이 들어가는 줄 몰랐다. 요새 나오는 대형 냉장고에 비하면 그리 큰 것도 아닌데도 냉장고 안에는 참 많은 것이 들어가 있었다. 그나마 김치 냉장고가 있어 다행이었다. 꼭 보관이 필요한 것만 골라 김치 냉장고로 옮겨 놓고 요리할 수 있는 건 다 요리해버렸다. 냉장고가 고장 났다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월요일이 되기를 눈 빠지게 기다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직원은 신속하게 와 주었다.

“이상해요. 내부에 불도 들어오고 돌아가는 소리도 나는데 왜 안 되는 거죠?”

냉장고를 꺼내놓고 한참을 이리저리 진단하더니 냉장고를 바꾸란다.

“배관에 문제가 있는데 수리하려면 비용이 좀 들어요.”

“얼만데요? 수리비가 비싸도 사는 거보다는 싸겠지.”

“한 십만 원쯤 드는데, 문제는 수리해도 다시 똑같은 고장이 날 확률이 높아요. 10년 이상 쓰셨지요?”

“15년쯤 되었네. 벌써 15년이 되었나?”

“오래 쓰셨네요. 평균 사용하시는 것보다 두 배는 더 쓰신 거예요.”

“그래도 보기엔 깨끗하니 멀쩡한데... 버리긴 아깝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새것으로 장만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사실은 이참에 요새 TV에서 광고하고 있는 문짝 두 개짜리를 하나 장만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문짝 두 개짜리 멋들어진 냉장고를 사리라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집 주방에는 냉장고 자리가 붙박이로 설계되어 있는데 옛날 집이라 그곳 넓이가 아쉽게도 문 두 짝 짜리가 들어가기에는 10센티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마음을 접고 문 한 짝짜리 중에서는 가장 크다는 것으로 사기로 했다. 그래도 고장 난 것의 두 배는 되는 용량이다.

“에이... 두 짝 짜리 꼭 갖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나마 오늘은 배달이 안 된단다.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한다네.

“냉장고 없이 또 하루를 보내라고? 토, 일, 월요일, 3일을 냉장고 없이? 큰일이네.”

어쩌겠는가? 참는 김에 하루 더 참아보아야지.

그런데 이상하다. 냉장고 없이 3일째가 되니 지낼 만하다. 음식도 한 번 먹을 분량만 요리를 해서 싹싹 먹어 치우니 더 개운하다. 첫째 날은 불안하고 불편하더니 이제는 별로 불편하지도 않다.

“그동안 너무 냉장고에 의존하며 산 겨. 냉장고 없는 생활은 상상하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없이도 살 만하네.”

넣어 놓을 것이 있어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냉장고가 있으니까 넣어놓을 것을 마련하는 건 아닐까? 요즘 냉장고는 날로 대형화되고 호사스러워지고 있다. 냉장고가 있어 식품을 썩지 않게 보관할 수 있어 자원을 아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 때문에 썩어나가는 식품들이 늘고 자원이 오히려 낭비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면 대형마트의 등장과 냉장고의 대형화가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냉장고가 적으면 우리는 조금씩 사게 될 것이고 버리는 것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이번에 나는 ‘냉장고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편견을 완전히 버렸다. 냉장고는 작을수록 좋다. 

박효신<br>
박효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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