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그 땅을 직접 밟아보는 것이 백 권의 기행문을 읽는 것보다 많은 걸 느끼게 하듯이 최근의 나의 짧은 경험은 그 동안 읽고 들은 것보다 절절한 느낌을 갖게 한다. 4년 여 동안 여성학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여성들의 경험을 고민해왔지만, 기업인으로부터 들은 짧은 몇 마디의 말과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광경들은 더 강렬하게 내 가슴으로 다가왔다.

최근 나는 기업체, 국가기관, 학교 등을 다니며 양성평등, 성희롱 예방교육 등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 한 남성 직장인을 만났는데, 여성들이 1∼2년 안에 대부분 그만둔다면서 어쩔 수 없는(?) 여성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이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는 경상계열 업무를 주로 하고 있는데, 여성들이 그 업무를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 여성들의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잠시 멈칫하더니 어문계열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그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하기 힘든 조건을 만들어놓고 여성들이 능력이 부족해 일을 빨리 그만둔다는 결론을 손쉽게 내리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승진과 관련 있는 주 업무에는 관련전공을 한 남성들을 주로 뽑아 배치해놓았으며 관련 전공자가 굳이 필요 없는 보조업무에는 주로 여성들을 뽑고 있었다.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기 위해 멀리 강원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여성들만 따로 모아 연수교육을 한다고 하기에 내심 반가운('여성들에 대해 회사가 상당히 신경쓰고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교육 담당자와 잠시 얘기를 나누며 곧 그것이 기우였음을 알게 됐다. 그 회사에서는 주로 '대졸업무에는 남성을, 고졸업무에는 여성을' 이분화해서 뽑고 있었다. 그것도 여직원들은 대부분 계약직, 파견직 근로자들로서 그 연수에 참여한 여성들도 대부분 고졸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었다. 남성인 그 교육담당자도 한 마디 한다. '요즘에 대졸 여성들 정말 갈 데 없어요.' 물론, 대졸, 고졸의 학력차이가 곧 개인의 능력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구조는 덜 전문적이고 더 보조적인 업무에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학력의 차이로 선별하고 있지 않은가.

성희롱이라는 것이 결국 직장에서의 권력, 지위의 차이, 성차별적 문화속에서 발생되는 것인데, 이미 대졸 남성들의 커피 심부름과 보조적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그 직장에 있는 여성들에게 내 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암담한 심정이었다. 처음부터 여성을 뽑을 자리들(단기간 직장에 머물며, 오랫동안 머물 남성들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을 미리 설정해놓고 뽑은 후에, 그 여성들의 주업무이자 역할로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성평등한 관계맺기와 직장문화를 역설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불성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에서 '기회의 평등'은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누가 얘기했던가. 유리천장과 유리벽만 있는 게 아니라 '유리문'도 엄연히 있음을 나는 얼마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서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여성들은 아직도 많은 곳에서 기회의 공평함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되는 결과를 주로 여성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남성들의 인식 또한 여전하다. 거대하고 촘촘한 사회구조적 차별 앞에서 지금 내 말이, 내 교육이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구조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참담해진 마음을 다시 한번 추스려본다. 지금의 내 바쁜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에.

강시현 미래여성연구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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