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자세와 무관하게
획일적인 높이 80~85cm 싱크대
‘주방=여성의 공간’ 고정관념 반영
옛 여성 평균 키에 맞춰 설계돼
이제 다양한 몸에 맞게 바뀌어야

한국가구시험연구원에서 인증한 가정용 싱크대의 표준 높이는 85cm. 과거 여성의 평균 키(155~160cm)에 맞춰 설계한 그대로다. 달라지는 성 역할도, 높아지는 평균 신장도 반영되지 않았다. ⓒ여성신문
한국가구시험연구원에서 인증한 가정용 싱크대의 표준 높이는 85cm. 과거 여성의 평균 키(155~160cm)에 맞춰 설계한 그대로다. 달라지는 성 역할도, 높아지는 평균 신장도 반영되지 않았다. ⓒ여성신문

‘싱크대는 왜 이렇게 낮을까.’ 키 178cm인 김주혁(36·경기도 하남) 씨네 집 주방 싱크대 높이는 85cm다. 김씨는 늘 허리를 굽히고 설거지했다. 장시간 주방일을 하면 목과 허리가 아팠다. 키가 167cm인 김씨의 아내도 싱크대가 낮다며 불편해 했다. 

최근 김씨 부부는 높이 95cm의 싱크대를 주문제작했다. “온·오프라인을 다 찾아봐도 저희가 원하는 높이의 제품은 없더라고요. 다 과거 세대의 몸에 맞춰 만든 것처럼 낮았어요. 싱크대를 높이느라 돈은 좀 들었지만, 10cm 차이로 더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잖아요.”

김씨의 말대로 일반 주택이나 가구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방 싱크대·작업대의 높이는 80~85cm다. 5월31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가구거리에서 본 싱크대 제품도 거의 높이 80~85cm였다. 6월2일 기준 이케아, 한샘, 현대리바트 등 소위 가구업계 ‘탑3’ 브랜드 싱크대·작업대 제품도 높이는 85~89cm다.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김씨만이 아니다. 키 168cm인 기자는 높이 85cm 싱크대 앞에 서면 상체를 굽혀야 해서 허리가 아플 때가 많다. 여성신문사 사무실 탕비실 싱크대 높이도 85cm다. 키가 181cm인 A기자, 키가 167cm인 B기자도 손이나 컵을 씻으려면 몸을 구부려야 해서 불편하다고 했다.

키에 상관없이 획일적인 85cm 싱크대 높이가 불편한 사용자들. ⓒ여성신문
키에 상관없이 획일적인 85cm 싱크대 높이가 불편한 사용자들. ⓒ여성신문

‘주방=여성의 공간’ 고정관념이 만든
획일적 싱크대 높이
이제 다양한 몸에 맞게 바뀌어야

왜 그럴까. 한국가구시험연구원에서 인증한 가정용 싱크대의 표준 높이가 85cm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가사일을 도맡아온 여성의 평균 키(155~160cm)에 맞춰 설계했다. ‘주방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성별 고정관념이 싱크대 설계에 반영된 셈이다.

높아지는 평균 신장도 반영되지 않았다. 통계청 2019년 자료에 따르면 10~30대 한국인의 평균 키는 168.94cm다. 1030 여성의 평균 키는 161cm 이상이고, 1030 남성은 약 173cm다. 획일적인 싱크대 높이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1970년대 한샘 주방 광고. ‘주방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당대의 성별 고정관념이 드러난다. ⓒ여성신문 자료사진
1970년대 한샘 주방 광고. ‘주방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당대의 성별 고정관념이 드러난다. ⓒ여성신문 자료사진
2018년 헨켈홈케어코리아의 주방세제 '프릴' 광고에는 남성 모델(배우 연정훈씨)이 등장한다. 달라진 시대상이 반영됐다.  ⓒ헨켈홈케어코리아 유튜브 영상 캡처
2018년 헨켈홈케어코리아의 주방세제 '프릴' 광고에는 남성 모델(배우 연정훈씨)이 등장한다. 달라진 시대상이 반영됐다. ⓒ헨켈홈케어코리아 유튜브 영상 캡처

몇몇 도시건축 전문가들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도시건축가 출신인 김진애 전 국회의원은 2015년 11월27일 여성신문 칼럼 ‘싱크대를 남자 키에 맞춰라!’에서 가족 논의 끝에 높이 82cm 싱크대를 남편 키에 맞는 90cm 이상으로 높인 일화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가장 중요한 디테일이 싱크대 높이”, “남자의 키와 남자의 미숙함을 배려해주는 부엌의 디테일은 무궁무진하다”고 덧붙였다.

정구원 건축가는 2016년 6월30일 한국일보 칼럼 ‘나에게 맞는 높이’에서 획일적인 싱크대 높이에 대해 “집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들에게는 싱크대 높이를 잘 생각해 보라고 은근히 밀어붙이곤 한다”, “(넓은 집과 고급 가전제품이 등장했지만) 실제 우리 몸의 가치는 잊혔던 것 같다. 키와 습관에 따라 높이와 너비를 세심하게 조율해야 하는 수치의 문제를 잊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여성신문
ⓒ여성신문

사람의 키에 따라 작업하기 편안한 높이가 다르다면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개인의 신체 비율 등에 따라서 다를 순 있지만 보통 이용자 키의 52% 높이가 적당하다고 한다. 이용자의 키를 절반으로 나눠 5cm를 더한 높이가 알맞다는 주장도 있다. 이 공식을 적용하면 평균 키가 168.94cm인 10~30대는 87.8~89.47cm 높이의 싱크대가 적당하다. 평균키 173cm의 1030 남성이라면 89.96~91.5cm 높이가 편리하다.

현실적인 싱크대를 만들려 노력하는 기업들도 있다. 롯데건설은 2016년 ‘드림키친’ 주방 시스템을 출시하면서 싱크대·작업대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선택형 주방 가구 설계를 강조했다. 한샘도 2016년부터 싱크대·작업대 제품의 기본 높이를 85cm에서 87cm로 높였고, 최근 89~90cm 등 다양한 높이의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케아는 싱크대 하부장과 다리, 상판까지 더하면 총 높이 약 90~92cm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휠체어 사용자도 쓸 수 있는 싱크대 디자인 ⓒiStockPhoto
휠체어 사용자도 쓸 수 있는 싱크대 디자인 ⓒiStockPhoto
휠체어 사용자도 쓸 수 있는 싱크대 디자인 ⓒiStockPhoto
휠체어 사용자도 쓸 수 있는 싱크대 디자인 ⓒiStockPhoto
2017년 경기도가 ‘중증장애인 주택 내 편의시설 설치’ 사업의 하나로 설치한 휠체어 사용자용 싱크대 ⓒ경기도
2017년 경기도가 ‘중증장애인 주택 내 편의시설 설치’ 사업의 하나로 설치한 휠체어 사용자용 싱크대 ⓒ경기도

나아가 싱크대에도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요구도 높다. 휠체어 사용자,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싱크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싱크대 하부장을 2단 구조로 설계해 다리를 넣고 앉아서 편하게 주방일을 할 수 있도록 한 디자인, 휠체어에 앉아서도 수도꼭지, 싱크대, 싱크대 위 선반장을 모터로 올렸다 내렸다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등이 이미 세상에 나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디자인도 사소한 문제로 불편이나 아쉬움을 남긴다면 ‘명품’이 될 수 없다고 소비자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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