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생존자입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7인의 이야기
놀라기엔 너무나 평범한 범죄
2016~2019 총 3065건 발생...연평균 약 766건
피해 털어놓기까지 보통 10년
10~20년에 불과한 공소시효가 걸림돌

어버이날인 5월8일,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사거리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여성신문
어버이날인 5월8일,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사거리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여성신문

딸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아빠, 동생을 추행한 오빠, 알고도 침묵한 엄마와 친척들.... 가해자들은 수십 년째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명아’를 해친 아빠는 사망했다. “아내를 잃고 힘들게 자식을 키우던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 ‘민지’를 추행한 사촌오빠는 “왜 나를 용서하질 않느냐”며 도리어 화를 냈다.

놀라기엔 너무나 평범한 범죄다.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다. 

여성신문이 1월15일 경찰청에 정보공개청구해 입수한 ‘친족성폭력 발생 건수’ 자료를 보면 지난 4년간 총 3065건(△2016년 675건 △2017년 776건 △2018년 855건 △2019년 759건) 발생했다. 연평균 약 766건 일어난 셈인데, 실제 범죄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를 보면, 총 상담 건수 715건 중 친족과 친인척에 의한 성폭력이 102건(14.3%), 친족에 의한 피해가 59건(8.3%)이다.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어린이(13세-8세)와 유아(7세 이하)인 경우는 각각 17건(33.3%), 11건(47.8%)이었다. 청소년(19세-14세)이 친족에 성폭력을 겪었다는 상담 건수도 13건(23.5%)이나 된다.

경찰의 2020년 친족성폭력 범죄 통계와, 2020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로 본 친족성폭력 피해자 연령별 현황. ⓒ여성신문 ⓒ여성신문
여성신문이 1월15일 경찰청에 정보공개청구해 입수한 경찰의 2020년 친족성폭력 범죄 통계 ⓒ여성신문
경찰의 2020년 친족성폭력 범죄 통계와, 2020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로 본 친족성폭력 피해자 연령별 현황. ⓒ여성신문 ⓒ여성신문
2020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로 본 친족성폭력 피해자 연령별 현황. ⓒ여성신문 ⓒ여성신문

법의 심판은 머나먼 얘기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고작 10년. ‘패륜’이라는 낙인, ‘나 때문에 가족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기기엔 부족하다.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첫 상담을 받는 데에만 보통 10년이 걸린다는 통계가 있다. 가족들조차 ‘지난 일은 잊자’, ‘기도하라’며 쉬쉬하고 외면하는 일이 흔하다. 생존자들의 말대로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길고 외로운 싸움이다.

그럴수록 드러내 알려야 한다며, 홀로 우는 이가 없어야 한다며 행동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벌이는 생존자들이다. 2월엔 국회 앞에서, 지난 어버이날엔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명아’는 5월8일 광화문 시위에서 ‘나는 친족성폭력 피해자다’ 어깨띠를 둘렀다. ⓒ여성신문
친족성폭력 생존자 ‘명아’는 5월8일 광화문 시위에서 ‘나는 친족성폭력 피해자다’ 어깨띠를 둘렀다. ⓒ여성신문

생존자 ‘명아’는 8일 시위에서 ‘나는 친족성폭력 피해자다’ 어깨띠를 둘렀다. “사진과 이름을 꼭 기사에 실어달라”고 했다. “피해자는 잘못이 없고 당당하다고 알리기 위해 오래 고민해서 만들었어요. 수십 년간 숨기고 참은 말, 확성기로 외치고 다니고 싶은 말입니다. 당당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수십 년간 혼자 애쓰고 참아왔던 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

명아는 아빠가 어린 자신에게 저지른 일이 성폭력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가족들에게 말했지만 외면당했다. 가해자 병간호도 했다. 그가 사망하고 나서야 피해 상담을 받았다. 35세에 쉼터에 들어갔다.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 용기를 얻었고, 40대가 된 지금 대학에 다니면서 심리상담 공부와 글쓰기, 친족성폭력 공론화에 힘을 쏟고 있다.

40대 ‘정인’, ‘단단’도 다른 생존자들과 거리 시위에 나서기까지 30여 년간 침묵했다. 각각 2017년, 2019년에야 상담소를 찾았다.

“친족성폭력은 일어날 수 없는 미친 짓이 아니에요. 평범한 누군가가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범죄입니다. ‘아빠 빼고 다 늑대’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폭력은 한 가정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알리고 싶습니다. 모든 남자가 잠재적 성범죄자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정 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으니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광장 시위는 더는 숨지 않겠다, 우리도 언제든 말할 수 있다는 상징적 행위죠.” (정인)

생존자 ‘풀’도 공감했다. “친족성폭력은 남사스럽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에서 자라서 말하는 게 두려웠고, 말하고도 도움을 받지 못해서 너무 오래 끙끙 앓았어요. 이제는 더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정인은 가정폭력·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수료했고, 공부와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단단은 동물권 등 다양한 구조적 차별·폭력에 관심이 많다. 공공미술 작업도 했고, 지금은 길고양이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풀은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고 있다.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모임 '공폐단단' 등이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를 촉구했다. ⓒ홍수형 기자
지난 2월22일 오후 국회 앞에서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모임 '공폐단단'이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열고 있다. ⓒ홍수형 기자

국내 첫 친족성폭력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펴내 친부가 9년간 저지른 폭력을 고발하고, 지금은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 디지털 성폭력 피해 상담사로 일하는 김영서씨도 시위에 나섰다. 그는 우리 사회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수기와 친족성폭력 논문을 쓰기 시작했던 2000년대 초만 해도 친족성폭력은 낯설고 외면받는 문제였는데요.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기쁩니다. 제 삶을 특이하게 보지 않는 친구들, 기사를 보고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많아요.”

대학생 민지는 반성폭력 활동가를 목표로 취업 계획을 세웠다. 그는 7세 때 사촌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약 10년이 지나 엄마에게 털어놓았지만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냐’는 말만 들었다. 가족 대신 자신을 도운 상담사, 다른 생존자들이 있어서 잘 살아왔다. 이제는 자신이 그런 존재가 돼 주고 싶다.

이어보기 ▶ 7살 때 성폭력, 오빠는 처벌받지 않았다 www.womennews.co.kr/news/212191 

ⓒShutterstock
ⓒShutterstock

여성신문은 <내 이름은 생존자입니다> 기획 보도를 시작합니다. 조명받지 못한 젠더폭력 ‘생존자’의 목소리를 보도함으로써 인권 증진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친족성폭력 생존자] 아빠·오빠의 죗값 묻지 않는 사회, 우리가 바꾼다 www.womennews.co.kr/news/212189

▶ [친족성폭력 생존자] 7살 때 성폭력, 오빠는 처벌받지 않았다 www.womennews.co.kr/news/212191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