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문단이 홀대한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
남성 문단이 홀대한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1.06.01 07:33
  • 수정 2021-06-01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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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30주기 ②]
소외된 민중, 더 소외된 여성을 껴안고
여성운동의 대중화 고민...여성연대 노래한 시인
아시아 뒤덮은 자본주의·식민주의 꿰뚫고
한국 넘어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생전이나 지금이나 공고한 남성중심적 문단서 홀대받아”

 

고정희 시인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중과 여성의 현실을 고민한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신문
고정희 시인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중과 여성의 현실을 고민한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신문

소외된 민중, 더 소외된 여성을 껴안고
여성운동의 대중화 고민...여성연대 노래한 시인

고정희 시인은 여성 위인부터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여성들, 도시의 여성 노동자들, 평범한 주부까지 역사가 억압하거나 홀대했던 여성의 자아에 해방의 언어를 선물했다. 김정란 시인은 2005년 5월 여성신문 기고에서 “고정희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해 민중에 대한 사랑을 거쳐, 민중 논의에서마저 배제된 여성들을 발견해 낸다”고 평했다. 특히 5월 광주를 그린 시가 “억압당하는 민중의 몸에 가해진 폭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대로 뒤집어 에너지로 뒤바꾸는 놀라운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 1983년 『이 시대의 아벨』 수록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

 

오매, 미친년 오네
넋나간 오월 미친년 오네
쓸쓸한 쓸쓸한 미친년 오네
산발한 미친년 오네
젖가슴 도려낸 미친년 오네
눈물 핏물 뒤집어쓴 미친년 오네
옷고름 뜯겨진 미친년
사방에서 돌맞은 미친년
돌맞아 팔다리 까진 미친년
쓸개 콩팥 빼놓은 미친년 오네
오오 오월 미친년 오네

- 1986년 『눈물꽃』 수록 「오매, 미친년 오네」 중

고정희 시인의 시집 『여성해방 출사표』(1990) ⓒ여성신문
고정희 시인의 시집 『여성해방 출사표』(1990) ⓒ여성신문

고정희 시인이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1984년 여성주의 문화운동 모임 ‘또 하나의 문화’를 창립하면서부터다. 1980년대 리얼리즘 논의가 한창일 때 ‘여성주의적 현실주의’라는 용어를 만들고 여성해방문학을 주창했다. 자신이 읽은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해 여성문학의 성취와 비전을 탐색하는 ‘여성사 새로 쓰기’ 연구에도 힘썼다. 시인의 논문은 한국 여성문학 비평의 출발점이 됐다. ‘여성운동’과 ‘문학’을 대립 개념으로 여기던 시대에 ‘창작이 곧 운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시인은 창작의 범위를 넘어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의 현실을 바꿀 방법을 도모했다.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맡으며 여성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여성신문 창간 선언문에서 ‘자매애’가 “남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주의 축을 옮기는 힘”이라며 여성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1991년 타계 전까지도 가부장제에 길든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노래했다.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맡은 고정희 시인은 ‘여성신문 0호’에 게재한 창간 선언문에서 ‘자매애’가 “남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주의 축을 옮기는 힘”이라며 여성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여성신문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맡은 고정희 시인은 ‘여성신문 0호’에 게재한 창간 선언문에서 ‘자매애’가 “남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주의 축을 옮기는 힘”이라며 여성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여성신문

우리 서로 봇물을 트자
할머니의 노동을 어루만지고
어머니의 모습을 씻어 주던
차랑차랑한 봇물을 이제 트자
벙어리 삼년세월 봇물을 트자
귀머거리 삼년세월 봇물을 트자
눈먼 삼년세월 봇물을 트자
달빛 쏟아지는 봇물을 트자
할머니는 밥이 아니어도 좋아라
어머니는 떡이 아니어도 좋아라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한반도 덮고 남을 봇물을 터서
석삼년 말라터진 전답을 일으키자
일곱삼년 가뭄든 강산을 적시자

- 1987년 「또 하나의 문화」 제3호 권두시 「우리 봇물을 트자」 중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과 만나 도랑을 이뤘습니다. 도랑물이 다른 도랑물과 만나 개울을 이뤘습니다. 개울물이 다른 개울물과 만나 시냇물을 이뤘습니다. 시냇물이 다른 시냇물과 만나 강을 이뤘습니다. 작은 강과 큰 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고 북한강을 이루고 낙동강을 이루고 영산강과 섬진강을 이루며 흘러갔습니다. 강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따뜻한 동행을 이루며 흐르고 다시 흘러갑니다. 여성신문과 독자는 하나의 강입니다. 때론 부질없고 시원찮고 때로 못나고 어리석은 동반자라 하더라도, 만고풍상을 견뎌내고 비로소 광야에 이르는 물의 힘과 지혜로 여성신문은 뻗어나가겠습니다.”

- 1988년 12월2일 여성신문 창간호,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 따뜻한 동행’ 중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 1990년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수록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중

아시아 뒤덮은 자본주의·식민주의 꿰뚫고
한국 넘어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중과 여성의 현실도 고민했다. 유고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에 실린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에서는 탈식민주의적 페미니즘의 단계로 나아간다. 이소희 한양여대 교수는 “한국뿐 아니라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여성들이 경험한 자본주의와 신식민주의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이러한 양상들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시에 담아낸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이라고 평가했다(『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 고정희의 삶과 문학』, 2018).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시아엔
네 탯줄을 결정짓고
네 길을 결정짓는 힘이 따로 있었구나
네가 네 발로 걷기도 전에 아시아엔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받아야 할
밥과 미끼가 기다리고 있구나
고개를 똑바로 들려무나 아이야
아시아의 운동장을 뛰어가려무나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밥을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절하는 거란다
네가 무릎 끓며 미끼를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무릎 끊는 거란다
네가 숨죽여 고개 숙일 때
그것은 아시아의 하느님이 고개 숙이는 거란다

- 1992년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수록 「아시아의 아이에게」 중

고정희 시인의 유고집이 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여성신문
고정희 시인의 유고집이 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여성신문

“생전이나 지금이나 공고한 남성중심적 문단서 홀대받아”

그러나 시인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홀대됐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여성신문은 2005년 5월 “고정희 시인은 시인으로서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민중운동가, 여성운동가, 탈식민주의적 글쓰기를 실천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고정희 시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여성운동 영역 내에서만 이야기될 뿐 그가 남긴 업적과 성과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전사회적인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생존했을 때와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공고한 남성중심적 문단, 나아가 사회는 변함이 없다”고 보도했다. 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타계 30년인 지금도 동의하는 지적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도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스마’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겁게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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