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여자'의 비극

이용숙/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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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설득작전을 펴는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에토레 바스티아니니)과 고뇌하는 비올레타(마리아 칼라스). 1955년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공연.▶

물리적 폭력 또는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들은 교활하게도 대개 피해자의 사회적 배경을 계산해둔다. 가정폭력의 경우, 배우자에게 돌아갈 친정이 없거나 발벗고 편들어 줄 그 누구도 없을 때 가해자는 더욱 잔인하고 뻔뻔스러워진다. '네까짓 것쯤, 죽여도 문제 될 것 없다'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더구나 피해자가 성매매의 대상인 경우라면 피해자의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철저히 물건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해자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여자'로 비치는 사교계 매춘부의 비극을 그린 오페라가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소설 <동백아가씨>를 각색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전 세계에서 <라 보엠> <카르멘> 등과 더불어 가장 자주 공연되는 인기 오페라의 하나다. 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사내들과 사교계 매춘부들이 어울리는 파티를 전전하며 남자들을 즐겁게 해준 대가로 생계를 꾸려 가는 여성인데, 즉석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지어 부를 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고 사교 수완도 뛰어난 것을 보면 옛 평양기생 비슷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빈민 출신의 가출소녀, 귀족의 하녀가 낳은 사생아, 어머니가 빈민구호 병원에서 사망한 고아, 귀족들간의 혼외정사에서 태어나 버려진 아이 등등 비올레타의 출신에 대한 추측은 다양하다. 어쨌든 이런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가 비올레타를 오페라 제목에 나오는 '트라비아타'로 만들었는데, 이 단어는 '바른 길을 벗어난 여자'라는 뜻이다. 이 시기에 귀족을 압도하며 떠오른 부르주아 계급은 정실 자녀에게 유산을 상속해 자신들이 상공업으로 축적한 부를 보전하려 했는데, 여러 명의 처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면 재산이 여러 갈래로 찢기기 때문에 이들은 일부일처제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남자들의 '적당한' 외도를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이중윤리가 생겨난 것이다.

매춘부 생활로 폐병을 얻어 고생하는 비올레타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지켜보다가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는 부르주아 청년 알프레도. 처음에는 코웃음쳤지만 결국 그의 진지한 열정에 감동해 사교계 생활을 청산하고 교외에 셋집을 얻어 알프레도와 살림을 시작한 비올레타.

그러나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나타나 교묘한 회유와 호소로 비올레타를 떠나게 만들고, 비올레타가 사교계를 못 잊어 떠난 것으로 오해한 알프레도는 파티에서 비올레타의 얼굴에 돈을 뿌리며 폭언으로 인격을 짓밟는다. 시간이 흐른 뒤 진실이 밝혀져 알프레도는 비올레타를 찾아가고 그의 아버지 역시 용서를 빌지만 이미 병이 깊어진 비올레타는 그들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축배의 노래'등의 명곡을 포함한 베르디의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음악, 집시 처녀들과 투우사들이 등장해 보여 주는 화려한 춤과 합창, 남녀 주인공의 정열적인 사랑, 비올레타와 알프레도 아버지가 벌이는 팽팽한 심리전…. 이 모든 요소들의 엄청난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를 철저히 이용하고 짓밟고 죽음으로 내모는 가부장제 사회의 잔인함을 그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베르디 시대 파리의 상류층 관객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이 작품을 정면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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