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빌 언덕 같은 존재
용기를 주는 존재로
너무나도 중요한 페미니즘적 유산
여성과 여성을 연결하는
고정희의 힘은 여전히 살아있다

1987년 동인캠프에 참석한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1987년 동인캠프에 참석한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닮아서는 안 되는 위험한 여자?

4-5년 전 고정희를 연구하며 “꼭 너 같은 것을 연구한다”는 모욕적 언사를 들어본 적이 있다. 고정희는 “결혼을 해서 살림을 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않은, 소위 여성적 삶을 살지 않은 꼴불견 여성인데 너도 그런 류의 여성이지 않냐”는 것이었다. 결국 그러한 여성은 끝이 좋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황당한 언어적 폭력을 당한 뒤에 끙끙 앓았다. 고정희가 마주쳤을 가부장적 사회로부터의 적대감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몸소 실감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출현해야 한다. 그 방식을 규정하는 사람은 누구인 것일까?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에 반기를 들며 나는 고정희가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고정희는 ‘이단’적 여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전의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생전의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여성다운 여류’로 인정받는 안정화된 길을 거부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초혼제』, 『지리산의 봄』,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출사표』 등 총 열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고정희가 지녔던 창조에너지는 긍정적 반응만 낳았던 것이 아니다. 고정희는 습작기부터 “너무 사회성이 강하다느니 좀 부드러운 이미지 쪽으로 보완돼야” 된다는 핀잔 내지 충고에 지속적으로 직면해야 했다. 여성이 쓴 문학은 여성다워야 한다는 고정 관념 내지 편견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정희는 “자신에게 절박한 것을 써야 그것이 시”이며 창조에너지에는 남성 여성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했다. 이는 여성 작가를 여성성에 가둬보는 것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정희는 ‘여성다운 여류’ 시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길을 걸었다.

민중적 관점에서 당대의 지배 권력을 비판하는 시들을 썼던 것은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 되기도 했다. 고정희는 당대의 정치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시를 썼는데 이는 정치가 남성의 영역이라는 인식을 교란하는 측면도 있었다. 고정희에게 “정치현실과 예술은 혼”은 따로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현실’이라는 렌즈가 곧 꿈의 광맥을 켜는 도구”였다.(고정희 시집 『눈물꽃』의 후기 中) 고정희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광주에서 시대의식을, 수유리 한신대 시절에 민중과 민족을 얻었던 시인이었다. 이는 ‘여성’과 함께 그의 시작 내내 지속된 화두였다. 고정희는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부조리한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며 변혁과 저항을 상상하는 바람이 그의 시에서 계속 불고 있었다.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무리라/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고정희의 시 「이 시대의 아벨」 중)

우리 봇물을 트자

또하나의 문화 동인지 제3호 『여성해방의 문학』 (평민사, 1987) ⓒ여성신문
또하나의 문화 동인지 제3호 『여성해방의 문학』 (평민사, 1987) ⓒ여성신문

고정희는 광주의 일을 잊지 못한 그리고 민중을 사랑한 시인인 동시에, 여성해방문학의 탄생을 주도한 여성주의 출판문화운동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었다. 이는 여성주의 동인모임이자 문화운동 그룹이었던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를 만나 꽃피운 고정희의 면모이기도 했다. 또문은 1984년 사회학, 인류학, 여성학 등 주로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여성 지식인이 주도해 생겨난 동인모임이자 여성주의 문화운동 그룹이었는데, 이 그룹에 시인이었던 고정희 역시 합류했다.

고정희는 또문이 만들어지면서 기획한 첫 행사였던 “글을 쉽게 쓰는 방법”이라는 공개특강에 강연자로 참여했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1984년 9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이 강연에서 고정희는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로 대두되는 주제와 그것을 형상화시키는 소재를 통해서 자기 목소리를 가지려면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참신한 언어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시적 언어에 대한 이 평범한 논의는 단순히 시창작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참신한 언어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시인이 되려는 시인 지망생에게뿐만 아니라 언어(자아)를 찾으려는 여성에게도 요구되는 노력이자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들의 언어 찾기는 한 여성 개인이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것만으로 녹록치 않았다. 고정희 역시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고정희는 또문 동인지 제3호 『여성해방의 문학』(평민사, 1987)의 기획 및 편집을 주도하며 여성 문인들의 참여를 이끈다. 강석경‧박완서‧이경자‧김승희‧김혜순 등의 여성 문인이 해당 호에 ‘여성해방’과 관련된 자신의 작품을 실었다. 고정희는 해당호의 권두시인 「우리 봇물을 트자」를 썼다. 고정희는 이 시를 통해 “오랫동안 홀로 꿈꾸던 벗”에게 함께 더 큰 물줄기를 만들어가자고 호소한다. “옷고름과 옷고름을 이어 주며/우리 서로 봇물을” 트게 되었을 때 만날 수 있는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을 고정희는 꿈꾸고 있었다.

그대 홀로 꿈길을 맴돌던 봇물,/스스로 넘치는 봇물을 터서/제멋대로 치솟은 장벽을 허물고/제멋대로 들어앉은 빙산을 넘어가자. (「우리 봇물을 트자」 중)

고정희는 여성해방적 언어가 계속해서 샘솟을 수 있는 물을 대는 작업을 여성들이 연결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성과 여성을 연결하는 작업을 주도하면서, 고정희 역시 많은 힘을 얻었을 것이다. 고정희는 여성해방문학의 ‘영웅’적 저자로 탄생하고 있었다. 고정희는 연작시 「여성사연구」를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과 탈환회 등을 조명해 여성과 역사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고, 매 맞는 여성을 매 맞는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급진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연작시 「이야기 여성사」를 통해서는 한국 역사 속 여성인물인 황진이, 이옥봉 등이 서로 편지를 보내는 상황을 연출함과 동시에 과거의 여성과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소통 공간 역시 개방하고 있었다. 고정희는 여성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인식 체계를 발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폄하돼온 여성의 경험과 문학 행위에 입지를 부여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이때 굿 가락과 사설, 구어체, 서간체 형식 등을 활용함으로써 여성주의적 문체혁명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고정희는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주간을 지내고 떠난 필리핀에서의 체류 경험을 토대로 ‘밥과 자본주의’연작을 쓰며 ‘제3세계와 여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며, 여성 연대의 확장 내지 변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1991년에 있었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출간된 또문 동인지 9호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는 그의 빈 자리와 연결의 힘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문단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이 해당 호에 아무런 ‘창작’ 작품을 싣지 않았다는 것은 고정희의 부재를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고정희와 또문 동인 활동을 함께 한 여자친구들이 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통해 행했던 진한 애도는 고정희라는 존재가 여성과 여성을 연결하는 힘으로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임을 예고했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등 또하나의문화 동인들과 함께 있는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등 또하나의문화 동인들과 함께 있는 고정희 시인 ⓒ여성신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

강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고정희의 시 「독신자」의 부분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에 실린 시 「독신자」는 자신이 죽은 뒤의 풍경을 상상하는 상황을 그린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남겨진 사람들은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이 슬픔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물결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가 죽은 뒤에 섞이기 바랐던 푸른 강물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시신에 수의를 입히며 우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저 칼날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라고 말한다. “칼날같은 세상”을 살았던 사람의 상한 몸 앞에 남겨진 사람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져온다. 나는 고정희가 “칼날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행은 또한 기쁨이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여성들을 외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 그가 걸었던 길이 여성들이 가는 길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여자들이 고정희를 사랑했다. 그리고 고정희를 사랑한 여자들을 또 다른 여자들이 사랑하게 됐다. ‘고정희청소년문학상에서 만나 글도 쓰고 문화 작업도 하는 이들의 마을(里)’, 줄여서 고글리 모임에 지난 3월 구경 갔다가 고정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고글리 모임에 참여했던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답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이 대답이야말로 여성과 여성이 연결됐을 때 생기는 힘과 에너지를 믿었던 고정희의 정신이 깃든 것이다.

고정희는 닮아서는 안 될 위험한 여자가 아니다. 여성에게 세상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비빌 언덕 같은 존재, 불화와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주는 존재로 너무나도 중요한 페미니즘적 유산이다. 여성과 여성을 연결하는 고정희의 힘은 여전히 살아있다. 고정희의 무덤가에 모인 여성들은 그를 외롭고 불행하게 살다간 여성으로 기억하지 않으며, 오히려 춤추고 노래한다. 고정희는 우리의 ‘배후’이기 때문이다. 4~5년 전 당한 모욕에, 가부장제라는 배후를 믿고 까부는 이들에게 반드시 이 말을 꼭 돌려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고정희라는 ‘배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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