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의 딸로 노동 운동과 여성 권리를 위해 싸운 페미니스트 엘리너 마르크스의 마지막 인생 15년을 그린 영화 '미스 마르크스'(수잔나 니키아렐리 감독).
칼 마르크스의 딸로 노동 운동과 여성 권리를 위해 싸운 페미니스트 엘리너 마르크스의 마지막 인생 15년을 그린 영화 '미스 마르크스'(수잔나 니키아렐리 감독).

‘…일어나라,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정복될 수 없을 무리로 ! 묶은 사슬을 이슬처럼 땅에 털어버려라, 잠들었을 때 묶어놓았던 : 당신들은 많고 그들은 적다!’ (셸리, ‘무질서의 가면’)

영국의 멘체스터시에서 열렸던 의회대표제 개혁요구 집회를 기병대가 살상으로 해산시킨 ‘피터루 대학살’(1819)이 일어나자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는 분노에 떨면서 다수인 당신들이 깨어나면 소수의 억압자를 물리친다며 미래의 승리를 고취시켰다. ‘푸시켓’ 고양이를 좋아해 ‘투씨’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꼬마소녀는 셸리의 기상을 사랑했고 훗날 그를 ‘사회주의자’ 시인으로 주장하는 글(1888)을 쓰기도 했다. 세 살에 셰익스피어 시를 읽고 열 살에 자신을 정치고문으로 써달라는 편지를 링컨 대통령에게 보냈던 투씨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투쟁을 주도한 19세기 후반 영국 정치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된다.

투씨는 19세기 말 항만노동자 파업과 실버타운 가스노동자 파업을 이끌면서 현대 영국 노동운동의 길을 열어준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였고 수백 명 여성노동자들을 조합으로 조직해냈던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여성권리를 쟁취해나가는 여성참정권운동을 인정했던 반면에 에이블링과 함께 쓴 ‘여성문제’(1886)에서 참정권 운동만으로는 경제적 억압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킬 수 없다면서 사회주의 투쟁을 통해서만 모든 여성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선구였다. 아동노동 철폐를 주장하고 여성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을 이끌어냈던 투씨는 영국 최초의 사회주의자 정당인 ‘사회민주연맹’의 핵심 인물로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선봉으로서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중심에 서서 투쟁에 몰입했던 삶을 43세(1898)에 돌연 중단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투씨 “내 삶의 모토는 ‘전진’”

투씨의 본명은 엘리너 마르크스이고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칼 마르크스다. 그의 인생 후반부 15년의 삶을 그린 수잔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영화 ‘미스 마르크스’(2020)는 투씨가 스스로 삶을 중단하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투씨의 전체적 삶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투씨를 그의 동반인 에이블링 한 남성에 의해서 희생된 피동적 여성으로 인상지울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영국 정치사에서 19세기 후반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평가되는 투씨가 그처럼 나약할 수 없다면 인격적으로 좋은 평가받지 못했던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투씨는 왜 헤어나올 수 없었는지 지적이고 강한 페미니스트도 빠질 수 있는 ‘함정’의 좌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센 사람인 마르크스 부부는 파리와 브뤼쉘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849년 런던에 정착한다. 1855년 태어난 투씨는 살아남은 세 딸 중 막내였다. 학교보다는 가정교육을 주로 받았던 투씨의 선생님들은 찬란하다. 카를 마르크스 아버지와 그가 ‘천사아저씨’라 불렀던 제 2의 아버지인 ‘가족,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을 쓴 프리드리히 엥켈스가 언어, 세계문학, 정치역사, 철학 선생님들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라울 팩 감독의 영화 ‘청년 마르크스’(2017)에서 마르크스와 평등한 사상적 동반으로 정당하게 그려졌던 투씨의 엄마인 예니와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열정적이며 엥겔스와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엥겔스의 동반인 메리 번스는 투씨에게 자유, 독립, 노동과 사랑의 가치를 심어준 탁월한 선생님들이었다. 투씨와 두 언니들은 모두 부모의 다국적 경험, 국제노동자운동, 유럽 전역의 사상가들과 망명지식인들과의 역동적인 교류 속에서 불어, 독어와 영어에 능통하게 교육받고 아버지의 비서로 연구조교로 저널리스트로 작가로 번역가로 사회주의 운동가로 성장한다. 

영화 '미스 마르크스'의 한 장면.
아버지 칼 마르크스의 친필을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투씨는 홀로 유고를 정리하고 편집과 번역에 참여하면서 ‘자본론2’와 자본론3’ 출간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화 '미스 마르크스'의 한 장면.

투씨는 16살 때부터 아버지의 유능한 비서가 되어 국제회의에 함께 참석하는 등 아버지 연구과 활동을 돕다가 17세에 아버지를 찾아온 파리코뮌 망명자였던 매력적인 프랑스 저널리스트 리싸가라이와 사랑에 빠진다. 투씨의 부모는 투찌의 언니 둘이 모두 영국에 망명한 프랑스 혁명가들과 결혼해서 매우 힘들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리싸가라이와 투씨의 결합을 반대했다. 18세에 선생님 일자리를 얻어서 집에서 독립한 투씨는 리싸가라이와 약혼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부모의 간섭에 손을 들고 리싸라가이와 관계를 정리하고 부모집으로 돌아온다. 부모의 사후에 투씨는 자신이 부모를 위해서 가장 귀한 삶의 시간을 희생했는데 부모는 몰라줬다면서 자기연민을 보인다. 그의 억압된 욕망의 고통이 몸으로 표현되었던 듯이 마르크스의 평전(스테드만 죤스 2016)에선 투씨의 거식증, 일관된 침묵과 일중독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된 염려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아버지는 배우 수업비를 대주면서 투씨가 리싸가라이를 포기하면서 얻게된 고통을 원하던 배우가 되어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투씨는 아버지 연구보조와 비서활동 등의 ‘집안 일’을 하는 한편 연극과 문학에 관한 문예비평을 잡지에 발표하고 무대배우로 번역가로 생활비를 벌었다. 엘리너 마르크스(투씨)의 당대 문학적 기여는 적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마담보봐리’를 처음으로 영역했고 스칸디나비아어를 배워서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영어권에 소개했다. 훗날 투씨는 ‘인형의 집’ 패러디 희곡을 쓰고 주인공 노라역을 하면서 부르조아 남녀관계를 풍자했는데 투씨는 연극활동을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생각했다. 투씨는 약혼자였던 리싸가라이가 쓴 ‘코뮌역사’를 영어로 번역해서 아버지의 협조를 얻어 출간할 수 있게 도왔고 아버지 사후엔 마르크스 친필을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그가 홀로 방대한 유고를 정리해내고 편집과 번역에 참여하면서 ‘자본론2’와 자본론3’ 출간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려서 삶의 모토를 ‘전진’이라 고백했던 투씨는 그처럼 힘차게 살았다.

가치 없는 남성에 의해 파괴된 삶

부모의 사망 후에야 투씨는 ‘집안일’(아버지 비서일과 부모병간호)에서 해방되어 본격적으로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다윈진화론과 무신론을 강연하는 생물학자 에드워드 에이블링을 만난다. 에이블링은 별거상태의 기혼자면서 자유연애를 주창하는 무신론자였는데 필명을 갖고 활동했던 극작가이기도 했다. 연극무대에 열정을 갖고 있는 투씨는 마르크스 사상을 따르며 사회주의 정치강연을 하는 에이블링을 최고의 반려자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서 정치활동과 저술활동을 함께 하는 사실혼 부부가 된다. 에이블링과 3년째 살며 함께 쓴 ‘여성문제’를 보면 노동자들이 유한계급의 조직적 폭정의 피조물이듯이 여성들은 남성들의 조직적 폭정의 피조물이 되고 있다면서 여성해방을 고취시키고 있다. 투씨는 에이블링이 이같이 함께 쓰면서 그의 뒤에서 어린 여성들을 농락하는 남성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겠고 여성억압을 깊이 이해하는 선각적인 남성으로 굳게 믿었을 것이다.

에이블링은 사회주의자로서 수치를 모르는 낭비벽으로 여기저기 빚을 지고 투씨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투씨는 에이블링의 문제를 일찌기 알 수 있었겠지만 함께 정치활동과 자본론 번역작업과 여러 저술에 매달리면서 개인적인 실망때문에 그와 쉽게 단절할 수 없었던 삶의 국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실망을 눌러나가던 투씨가 자신의 인내에 혐오를 누를 수 없게된 시점은 에이블링이 힘이 약한 어린 여성들을 속이면서 피해를 주고 자신 또한 그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약한 여성’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남성에 대한 영국여성들의 ‘정신적 의존’을 비판했던 투씨는 어쩌면 심연에서 자신이 에이블링을 아버지에 대한 의존을 대치했던 남성으로 의존하면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자각했을 수도 있다. 정치활동을 함께하는 효율적 동지로 판단되어서 그의 경제적 부도덕성을 수없이 봐줄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여성경험이 많은 에이블링의 남성적 수단에 때때로 조종되었던 자신을 대면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투씨가 존경하는 시인 셸리 또한 ‘프랑켄스타인…’의 저자인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메리 셸리를 포함해 방만하게 관계했던 여러 여성들의 삶을 지독한 우울 또는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로 여성 파괴적 남성이었다. 투씨는 자신이 이같은 남성 포식자의 먹이감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투씨는 역사적 인물인 아버지의 영광과 그늘을 온힘으로 포용해서 사회주의자 정치인으로 페미니스트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여성과의 관계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배반하는 남성들의 파괴적 위선을 삼킬 수 없던 나머지 같은 사회주의자의 저항으로 페미니스트의 회한으로 자신의 삶을 중단했던 것 아닐까. 남성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면 투씨가 비판했던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정신적 의존’의 문제를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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