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보면 끝이 있겠지요 - ‘29년생 김두리’ 구술생애사] 16화. 인민군에 끌려간 동생

김두리 여사는 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할머니처럼 이름 없이 살아온 모든 여성들의 삶에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역사 연표에 한 줄로 기록된 사건들이 한 여성의 인생에 어떤 ‘현실’로 존재했는지, 그 잔인하고 선명한 리얼리티를 당사자의 육성으로 생생히 전합니다. - 작가 말

37㎜ 고사포(M-1939). 1939년 소련에서 생산한 대공포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도입해 사용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최규화
37㎜ 고사포(M-1939). 1939년 소련에서 생산한 대공포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도입해 사용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최규화

그래서 피란을 앤 가고 있으니까 느그 진외조모[할머니에겐 엄마]가 덕암[경북 영천시 고경면 덕암리]에 있는 할배[남동생]을 들고(데리고) 날 데릴러 둘이 왔더라꼬.

딴 거는 가져오지도 몬하고 부엌에다가 단지를 파서 묻어놓고[중요한 것을 단지에 넣어서 부엌 아래를 파서 넣어두고], 쌀마 요만침(만큼) 넣어서 덕암에 느그 할배[남동생]가 지고 왔더라꼬. 와가지고 날로(나한테) 같이 피란 가자 하더라고.

엄마가 동생 델고 낮에 왔어. 와서 밀수제비를 떠가지고 막 점심을 묵고 나니까 인민군이 닥쳤더라고. 내들(내내) 그래도 인민군을 못 봤지. 인민군도 못 보고 아군도 못 보고 그랬는데, 그날 인민군이 왔는 거야.

그래 동생을, 이웃 사람 하나하고 동생하고 둘이 마 붙들래(붙들려) 갔다. 자기네들 부상당하는 사람 미고(메고) 가야 되니까, 같은 동료니까 내삐고(내버리고) 갈 수 없잖아. 가다가 죽더라도 미고(메고) 가야 되니까, 그거 해야 된다꼬 남자들을 붙들고 갔는 거야.

날 데리고 피란 간다고 거 왔는데, 동생이 붙들래 가뿐 거야. 내 때문에 붙들래 갔는 거야. 그래 가뿌고 없어가지고, 엄마캉(랑) 나캉 “우야노(어쩌니)…….” 내들(내내) 울고 앉아 있으니까, 피란 와 있는 사람들이 달래주고 해사터라(그러더라).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난리판에 어짤 수 없잖아.

저녁도 안 하고 그래 있었다. 그때는 시계도 없었다. 여름이니까 한 열두 시나 넘었을 때, 새벽 한두 시 됐을까? 그래 동생이 왔더라꼬! 다 잠들고 한밤중에.

이자(이제) 어디쯤 가서 즈그[인민군들]도 잠을 잘 거 아이가. 거 대문 앞에는 보초를 세워놓고 마카(모두) 잠들었는 거야. 망보는 사람은 있어야 아군[국군]이 어디꺼정(까지) 왔다 하면 즈그 달러가든(달아나든) 대항을 하든 채비를 해야 될 거 아이가.

동생이 같이 붙들래 갔는 사람하고 본대(본디) 친면[서로 가까이 사귀어 잘 알고 있음]이 좀 있었어. 그 집이 우리캉 한[같은] 성이야. [그 사람 엄마한테] 내(늘) 아지매라 하고 그랬거든. 그래서 자는 거를 곱게[살살] 깨배서(깨워서), 둘이 살살 기어서 나왔단다. 여름이니까, 덥으니까(더우니까) 문을 열어놓고 잤는 거야.

김두리 할머니가 살던 영천‧안강 지역은 한국전쟁 초기 격전지였다. 전쟁기념관 전시물. ⓒ최규화
김두리 할머니가 살던 영천‧안강 지역은 한국전쟁 초기 격전지였다. 전쟁기념관 전시물. ⓒ최규화

그래 기어서 뒤로 나오니까 담이 있더란다. 울딸(울타리) 같으면 [헤치고] 나오기가 숩었을(쉬웠을) 건데, 담이니까 하나 떠받어 올리놓고 하나는 담 우에서 땡기올리고 이래서 넘어왔단다.

흘(흙)이 질질 얽어지더란다[흙담이 조금씩 부스러져 뭉개졌다는 뜻]. 붙들러 오는가 싶으더란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가다가 죽으나 붙들래 죽으나 한가지지 뭐.

담 넘어 떨어지니까 대밭이더란다. 대밭 속을 기가지고 나오니까 또 콩밭이 있어. 콩밭 고랑으로 삼통(줄곧) 기어왔는 거야. 길로 오면 군인들한테 붙들리까 싶어서.

아군인데(한테) 잡해도 밤에 그리 댕기니까 뺄개이(빨갱이)라꼬 죽고, 뺄개이[인민군]한테 붙들래도 달러간다꼬 죽고. 이쪼 잡해도 죽고, 저쪼 잡해도 죽고. 그니까 고랑으로 이래(이렇게) 삼통(항상) 살살 기(기어)가지고.

옷도 다 배렸어. 삼통 기어온다꼬. 무슨 소리 있을 때는 나무 밑에 가마(가만히) 엎드려서 있다가, 풀밭 속에 엎드려 있다가, 그래가 기어서 기어서 재로 하나 넘어서 왔더라.

옛날에 일제시대 곡석(곡식) 그튼 거 감직어(감춰두고) 묵는다꼬, 요 방에다가 안에 담을 쌓아가지고 꼴방(골방)이 요런 게 있었어. 여 드가는(들어가는) 문이 요만한 게, 곡석 가마니 들고 하나 드갈 만침(만큼) 문이 하나 요래 있는 거야. 저쪽은 다 밲에서 포(표) 없이로[표시나지 않게] 돼 있어.

고 감직어놔도, 일본 사람들은 그거를 몰라. 아는 사람은 알아도, 그양 봐가지고는 모르거든. 일본 사람들은 모르는데, 한국 사람들이 자기네 집도 그래 했으이 그걸 아는 거야. 자기네 집들도 고래 해놨는 놈들이 알고 디배내는(찾아내는) 거지. 못된 사람들은 그걸 자기네가 디배내는 거야.

그래 그라던 방이 있어가지고, 동생인데 거 들어가서 자라꼬 했는 거야. 답답기도 하지. 그래도 일단 숨어야 될 거 아이가. 그래서 동생을 거기 자라고 놔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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