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보면 끝이 있겠지요 - ‘29년생 김두리’ 구술생애사] 15화. 마당으로 피란 온 사람들

김두리 여사는 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할머니처럼 이름 없이 살아온 모든 여성들의 삶에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역사 연표에 한 줄로 기록된 사건들이 한 여성의 인생에 어떤 ‘현실’로 존재했는지, 그 잔인하고 선명한 리얼리티를 당사자의 육성으로 생생히 전합니다. - 작가 말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모습을 재현한 모형. 전쟁기념관 소장. ⓒ최규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모습을 재현한 모형. 전쟁기념관 소장. ⓒ최규화

육이오사변 때 등(산등성이) 너매(너머) 사람들이 우리 집에도 피란 와서 마이 있었어.

우리 마다아로(마당으로), 방앗간에로, 마개(마굿간, 외양간)로 와 있었어. 암만캐도(아무래도) 해가 빠지고(지고) 어더브면(어두우면) 쫌 춥잖아. 사람들 마카(전부) 이슬 안 맞는 데 잔다꼬 방앗간에로, 마개로 드가서(들어가서) 이래 자고.

뭐 잔다꼬 잠이 오나? 양사방(이쪽저쪽) 총살(총알) 떨어지고 포살(포탄) 떨어지고 하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거야[‘활-화살’ 관계처럼 ‘포-포살’, ‘총-총살’이라 부르는 듯]. 만일 [포탄이] 거 떨어졌다 하면 다 죽는다.

피란 왔는 사람 장 떨어지고 뭐 떨어졌다 하면, 없는 거는 몰라도 장은 우리 장꼬방(장독) 단지에 있으이 퍼다 묵아라(먹어라) 했다. 오늘 죽을동 내일 죽을동 모르는데 뭐 그 애껴놨다 뭐 하노, 그제? [작가 : 다 모르는 사람들이잖아요.] 낯선 사람들이지. 등 너매 사람들이 글로(그리로) 왔으니까.

울타리에 호박 숨가(심어)놨는데, 누런 이퍼리(이파리)가 없었다. 반찬이 없으니까 마카 그걸 뜯어가지고 비벼서 싞어(씻어)가지고, 우리 장 떠다가 멀건 장물[간장을 탄 물]로 해가지고 끓여가지고 묵는 거야.

저 앞에 못이 있는데, 냄비를 돌로 걸어놓고 호박 이퍼리 그거를 건디기(건더기)라꼬 넣어서 국을 끼래가(끓여서) 묵고. 그래서 줄거리만 앙상그레하이(앙상하게), 울타리에 호박 이퍼리가 하나도 없었다. 정구지(부추) 밭에 정구지도 띠(뜯어)묵고, 밭에 채소 있는 거 다 뜯어 무아라(먹어라) 했다.

해 빠지기 전에 밥을 해야 돼. 저녁에 불이 있으면 군인들 있는 줄 알고 포를 때린다꼬. 민간인일 줄 알머사(알면) 포를 앤 때리지. 근데 밥한다고 불을 피우면 여기저기 뻐떡거릴(번쩍거릴) 거 아이가, 불이?

뻐떡거리고 불이 마이 있으면, 군인들 주둔하고 있는 줄 알고 거 포살(포탄)을 때리는 거야. 비행기 타고 댕기면서. 밤에는 불로 피해야 되는 거야. 해 빠지기 전에 다 저녁을 해서 무뿌려야(먹어버려야) 된다니까.

그때 느그 증조모님[시어머니]이 우리도 피란 가자 하시더라고. 근데 느그 할아버지[남편]도 군대 가고 소식도 한 장 없제, 아(아이) 하나 없애뿟지[죽어버렸지], 뭔 생각에 내가 피란을 가겠노? 마 나는 죽어도 여 앉아서 죽는다꼬 앤 간다 했다.

“니는 오기 싫거든 오지 마라. 이거[아들] 하나 있는 거를 갖다가 씨는 이사야(대는 이어야) 되니까, 나는 이거 데리고 갈 끼다.”

그래 느그 증조모님이 느그 큰아버지[첫째 아들]만 들고(데리고) 가셨다.

포살(포탄)이 바리(바로) 우리 앞산에서 와서 떨어지고, 총살(총탄)이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어디 피란 갈 데도 없어. 덜한 데로 간다 하면서 가는 기, 가다가 죽고 오다가 죽고. 양식을 한참 마이 못 가주(가져)가잖아. 물 거 없어서 가지러 가다가 또 죽고, 그때 마이 죽었다, 야야(얘야).

사람이, 강둑에 저(저기)도 시체가 넘어디딜 만하이[넘어다녀야 할 만큼] 있었단다. 그마이 마이 죽었다. 포항 여기도 마이 죽고, 산꼴짝(산골짜기)에도 죽고, 미군도 죽고, 한국군도 죽고, 저쪽[북한] 사람들도, 넘어왔는 사람들도 마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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