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계형 배우”...‘이혼녀’ 편견에 꿋꿋이 버텨
가식 없는 솔직함에 젊은 세대 대호응 
세계 영화제 35관왕 휩쓸며 새로운 역사 써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에 도착, 레드카펫에 올라 웃음 짓고 있다.  ⓒAP/뉴시스·여성신문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에 도착, 레드카펫에 올라 웃음 짓고 있다. ⓒAP/뉴시스·여성신문

2021년은 윤여정의 해다. 올해로 74세가 된 그는 26일(한국 시간)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연기상을 수상했다. 앞서 미국배우조합(SAG) 시상식, 영국 아카데미상(BAFTA) 여우조연상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35관왕을 휩쓸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존버(최대한 버티기)’의 아이콘, 윤여정이 걸어온 50년 영화인생이 ‘미나리’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  

윤여정의 경쟁 상대는 자기 자신...도전 정신으로 버티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br>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윤여정은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의 경쟁 상대는 오직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외신이 주목하며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이라고 부르자 윤여정은 “칭찬은 감사하지만 난 나 자신을 안다. 메릴 스트리프와는 비교하지 말아 달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19살에 연기를 시작한 그는 첫 영화에서부터 파격을 선보였다. 데뷔작 ‘화녀’(1971)에서 그는 한 가정을 망가뜨리는 하녀 ‘명자’의 광기 어린 모습을 연기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충녀’에서도 김기영의 감독의 페르소나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는 이후 결혼과 함께 오랜 공백기를 보냈다. 

13년 동안 카메라 앞을 떠나 미국에서 살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의 전성기도 끝났고, 세간의 주목은커녕 ‘이혼녀’라는 편견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생계형 배우’가 됐다. 2017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윤여정은 이혼 직후 현업 복귀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했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야. 그런데 그 서러움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 같아.” 

ⓒ청어람
영화 '바람난 가족' 스틸컷. ⓒ청어람

2003년, 죽어가는 남편을 두고 바람난 시어머니로 스크린에 복귀(‘바람난 가족’)한 이후 윤여정은 한 해도 빠짐없이 관객을 찾아왔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살아가기 위해 목숨 걸고 연기했다. 아이를 키워내야 해 말도 안 되게 죽는 역할, 막장극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재벌가의 최고 실세 역을 맡아 젊은 남자 비서를 유혹하기도 하고(‘돈의 맛’·2012), 성을 팔아 살아가는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하기도 했다(‘죽여주는 여자’·2016).

이때부터 윤여정은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된다. 희생적이고 가족에 헌신하는 ‘어머니’ 역할을 주로 맡게 된 다른 동년배 배우들과 달리, 노출이나 노골적인 대사 등으로 다른 배우들이 꺼리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도전했다. 여성의 욕망과 다채로운 내면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할머니, 전형적인 엄마, 그런 거 하기 싫어요. 내 필생의 목적이에요.” 

이런 그의 열정과 도전정신을 일찌감치 알아본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은 “다른 배우들은 ‘캐릭터가 너무 세다’며 거절했지만, 윤 선생님은 ‘재밌을 것 같다’며 수락하셨다. 이후 ‘하녀’, ‘돈의 맛’ 등 파격적인 작품도 선뜻 출연하셨다”며 “(윤여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것, 안 해봤던 것에 대한 모험정신이 살아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래 살길 잘했다” “땅이 넓으니 상도 많구나” 솔직한 유머에 젊은 세대 감동

지난 4일 미국 배우조합(SAG)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SAG 인스타그램
지난 4일 미국 배우조합(SAG)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SAG 인스타그램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지명됐을 때 그는 “(귀국 후 자가격리 때문에) 이인아 PD와 둘이 축하 파티를 해야겠다. 그런데 PD가 술을 못 마시니까 혼자 술 마시며 자축해야겠다”고 소감을 남겼다. 대중을 의식해 번듯하고 뭉클한 소감을 밝힐 법도 한데 아무런 가식 없이 솔직하다. 수많은 상을 받은 이후에도 “내가 미국 할리우드 배우도 아니고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나라가 넓으니 상이 많구나’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윤여정은 무게를 잡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윤여정의 어록은 나영석 피디의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누나’(2013)부터 ‘윤식당’, ‘윤스테이’ 등을 통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정감 있고 유머 넘치는 면모가 알려지면서 ‘윤며들다(윤여정에게 스며들다)’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60살 돼도 인생은 모른다”라거나 “나를 비난하던 분들 이제 다 (세상에) 안 계신다” 등의 재치 있는 유머에 젊은층은 환호했다. 

윤여정은 노개런티로 출연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의 김초희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60살 넘으면서부터 웃고 살기로 했어. 전에는 생계형 배우여서 작품을 고를 수 없었는데, 이젠 좋아하는 사람들 영화에는 돈 안 줘도 출연해.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는 게 내가 누릴 수 있는 사치야.” 최고의 사치는 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 연기하는 거라며 여러 차례 젊은 감독과 독립영화를 선택한 그는 그렇게 '미나리'도 만났다. 영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자 그는 “오래 살길 잘했다”며 웃었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씨네마㈜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씨네마㈜

최근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사를 외울 수 있는 한 영화 인생을 계속하고 싶다”고. 50년 넘게 ‘존버’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스스로 써온 윤여정은 이번 오스카 시상식에서 또 새로운 역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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