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원 성인지교육 영상 뒤늦게 논란
여성 대상 범죄 일상화된 사회에서
남성 시민의 역할 제안하는 내용
일각 ‘남자=잠재적 가해자’ 취급 주장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잠재적 가해자와 시민의 책무’ 영상 캡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 영상 캡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양평원)이 지난해 제작한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라는 6분 남짓의 동영상이 뒤늦게 논란이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 “공공기관이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영상을 제작했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오자, 한 언론이 “논란”이라며 기사화했다. 남초가 좌표를 찍자, 언론이 이슈화한 셈이다. 이 논란에서 영상 내용과 맥락은 고려되지 않는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만으로 ‘성인지 교육’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공격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초가 ‘좌표’ 찍고 언론이 이슈화?

한 매체는 지난 12일 <‘남자=잠재적 가해자’ 여가부 산하기관서 만든 영상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개했다. 기사는 “해당 영상은 ‘남성이 스스로 잠재적 가해자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봤다. 이어 주말부터 해당 영상 관련 글이 온라인에서 퍼졌으며 “네티즌들은 해당 영상이 ‘남자=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을 더 키운다는 의견을 내놨다”고 했다. 이어 두 명의 네티즌 글을 인용했는데 구체적인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기자는 “전문가들은 양성평등을 위해 ‘피해자가 여성, 가해자는 남성’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했다”면서 여성학자 2명과 여성단체 대표 1명의 코멘트도 덧붙였다. 기사에 언급된 전문가들은 인용된 멘트는 본의를 왜곡한 것이라며 언론사에 항의했고 현재 전문가 2명의 멘트는 삭제된 상태다.

이 기사 이후 여러 매체에서도 해당 영상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해 논란이라는 취지의 기사를 송고했다. 논란이 일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양평원의 설립 취지를 망각한 교육을 중단하고 관련자들을 징계하시기 바란다’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논란은 남성 회원이 다수인 남초 커뮤니티에서 시작됐다. 지난 4월10일 에펨코리아‧엠엘비파크‧뽐뿌 등에는 ‘요즘 남자중학생들에게 영상 교재로 쓰인다는 충격적인 영상’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게시물은 양평원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해당 영상, 영상 캡쳐 이미지 1장과 함께 “아예 잠재적 가해자라고 못박고 교육 시작함 ㅋㅋㅋㅋ”, “이러니 10대 남자에서 지지율이 개박살나지. 정신 못차렸음. 전혀”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잠재적 가해자와 시민의 책무’ 영상 캡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 영상 캡처.

‘잠재적 가해자와 시민의 책무’ 영상 살펴보니
남성, ‘잠재적 가해자’ 표현 분노할 수 있지만
실제 범죄 피해 대상인 여성에겐 ‘생존’ 문제
신뢰 회복 위해 성찰하고 노력하자는 내용

지난해 2월 양평원 동영상 콘텐츠 플랫폼 젠더온에 게시된 이 영상은 나윤경 양평원장의 설명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상 내용을 요약하면, 남성들이 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는 것에 분노할 수 있지만, 실존하는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공포와 낙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여성들이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한다. 이어 남성이 동료 시민으로서 이런 현실에 공감하고, 함께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시민의 책무라고 이야기한다.

젠더온에 게시된 영상 설명에서도 “일부 남성들은 이런 성인지 교육이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불쾌해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나의 ’기분‘과 다른 사람의 ’생존‘이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요”라고 묻는다.

이어 “그동안의 피해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가 있다면, 불쾌해하기보다 그 맥락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려는 노력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제안한다.

실제로 나 원장은 영상에서 “한국 여성들은 ‘아빠 빼고 남자는 다 늑대·도둑놈이야’라는 소리를 아버지, 즉 남성에게서 듣고 자란다”며 “사회에 나와 남자인 친구·선배·상사를 의심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가 성폭력을 당하면 ‘네가 조심했어야지’ ‘꽃뱀인가’ ‘자기도 좋았던 거 아니냐’라며 피해 여성을 비난한다”고 했다.

이어 “여성들은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때문”며 “남성들은 의심한다고 화를 내기 보단 자신은 나쁜 남성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시민적 의무’라고 정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나 변함없이 갑 또는 을의 위치에 있을 순 없다”며 “맥락에 따라 위치가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 원장은 갑의 위치에 있을 때 기분이 나빴다는 입장도 중요하지만, 을의 입장에서 상상해보고 합리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시민적 의무’라고 설명하며, 중국동포 가사도우미 사례를 예시로 제시했다. 가사도우미가 일당을 선불로 달라는 말에 어머니가 ‘자신을 돈 떼먹을 나쁜 사람’으로 취급했다며 기분 나빠하자, 딸이 이전에 임금을 떼인 경험이 반복됐고, 생계가 달린 문제라고 설명하며, 임금을 월급처럼 먼저 주거나 명절 때 선물도 주는 식으로 돈 떼먹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제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기분이 나쁘다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나는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보여주는 노력’이 바로 시민적 의무라는 설명이다.

나 원장은 “특정 상황에서 남성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경계하려는 여성들의 노력이나 남성들에게 성인지적 태도와 감수성을 제시하려는 교육에 대해 ‘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느냐’라고 화를 내기 보다는 ‘스스로가 가해자인 남성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정성스레 증명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제안한다. 

비판 이어지자 곧바로 영상 비공개 처리 결정

비판 기사가 이어지자, 양평원은 13일 설명자료를 내고 “전문가 자문 등을 통해 내용 전달의 명확성을 기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교육내용과 교육콘텐츠에 대해 본래 취지와 다르게 해석되거나 오해가 될 수 있는 사항이 없도록, 앞으로도 교육과 관련하여 교육생·전문가 등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영상은 14일 양평원 유튜브 채널에서 비공개 처리됐다. 양평원 상급기관인 여성가족부도 비판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성인지 교육은 교육받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 경험하고 있는지 의식, 태도 등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좋은 의도로 교육해도 교육 대상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교육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내용에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정 장관은 “성차별과 성범죄 피해자에 아무래도 여성이 많지만, 가해자가 모두 남성으로 생물학적인 남성, 여성 프레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며 “오히려 생물학적 문제이기보다 성별 권력관계 문제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이런 성별 관계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며 교육이 대상자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대상자별로 차별화되는 섬세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번 논란을 두고 ‘제2의 나다움 어린이책 사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8월 25일 김병욱 의원이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다움 어린이책으로 선정된 134종의 책 가운데 7종의 책을 거론하며 “조기 성애화가 우려된다”, “동성애를 미화·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여가부는 지적이 나온 하루 만에 나다움 어린이책 7종 총 10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사업 추진 부처이자 성평등 정책 주무부처인 여가부가 반대 측을 설득했어야 했으나, 논란이 두려워 손쉽게 회수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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