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해가 기우니 마음도 기운다.

세상이 어수선해서 마음이 기우나? 세상 어수선한 거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반백 년 넘어 살다 보니 이골이 나서 아무렇지도 않다. 도대체 태어나서 한 번도 조용한 때가 없었으니 만약 세상이 조용해진다면 적응하느라 쩔쩔맬 것 같다. 그러니 세상 따위야 나 죽을 때까지 그냥 어수선하라지 뭐. 아니면, 한 살 더 먹는 게 서글퍼서 마음이 기우나? 시간이야 지 마음대로 흐르라지, 난 내 맘대로 살 테니까.

마음이 기우는 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친구 둘이가 동시에 아프기 때문일지 모른다. 미녀 삼총사를 자처하는 우리 셋은 참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다. 큰 욕심 없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일종의 사회부적응자 적인 인간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웃는다는 점에서 잘 통한다.

몇 년 전 내가 먼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술 마시는 횟수가 확 줄었다. 세상 사는 재미가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궁시렁대면서도 핑계만 생기면 아니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술자리를 마련해내던, 정말 못 말리는 호주꾼들이 우리였다. 그런데 나하고는 달리 평소 건강관리를 꽤 잘해오던 친구들 둘이가 갑자기 간에 문제가 생겨 입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앞으로 술 마시는 재미는 영영 없어질 것 같다.

살수록 확실한 게 없어

아무리 술꾼이지만 술 못 마시게 돼서 마음이 기운다고 징징거린다면 정말 웃기는 짓이다. 그게 아니라, 친구들의 갑작스런 입원을 계기로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확인이 되는, 인생은 오리무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도대체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나마 확실한 것이라면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은 좋은 일보다 궂은 일을 더 많이 겪게 되리라는 전망 정도. 그렇지만 그 궂은 일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내 앞에 떨어질지는 예측 불가능이다.

아니, 친구들이 간 좀 나빠졌다고, 그래서 인생은 불확실하다고, 그래서 마음이 기운다고 푸념을 늘어놓다니 푼수도 이런 푼수가 또 없네. 온세상 사람들이 그깟 일로 마음이 기운다고 엄살을 떨어댄다면 지구는 벌써 오래 전에 다 기울어버렸을 거야.(참, 그래서 지구가 좀 삐딱한지도….)

맞다. 안온하기만 할 것 같은 일상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져버리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차 하는 순간 삶의 모퉁이마다 깜쪽같이 숨어 있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얼마 전에 내 친구 하나는 엉뚱한 의료사고로 생떼 같은 남편을 잃기도 했다.

새털처럼 가볍게 살았으면

엊그제 인터넷 신문에서 읽은 한 가족의 이야기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옮기기도 괴로울 정도다.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는 수술 도중 사망하고, 아들은 어머니의 수술비를 갖고 병원으로 오는 도중 자동차에 치여 죽고, 평소 어머니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되뇌던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화목하게 살아가던 일가족이 불과 이틀 사이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일흔 살의 아버지만 달랑 남았단다. 열심히 살아왔을 그 아버지, 인생을 돌아보면 과연 무엇이 보일까.

예전에는 불행한 사건 속의 사람들은 모두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딴 세상 사람들로 여겼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참 안됐구나, 내가 안 당했으니 다행이구나라고 가슴을 쓸어 내리곤 했다. 이젠 다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특정인물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알 것 같다. 때문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뉴스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아이구, 저절로 한숨이 터지는 빈도가 잦아져 간다.

불행이란 놈이 때를 가리지야 않겠지만 해가 기우는 즈음이면 가슴 아픈 소식들이 더 잇따르는 것 같다. 수능시험을 못 봤다고 떨어져 죽는 아이도 아이지만 그 어머니의 마음이 헤아려져 가슴이 더 꽉 막힌다. 돈 벌러 간 이라크에서 피격당해 죽은 아버지들도 안타깝지만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내들의 충격이 못내 걱정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과제다. 그 짐을 어깨에 얹고도 새털처럼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면!

이제 쉰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헤라니, 열일곱 살 적 사춘기로 돌아가, 문학소녀처럼 써봤습니다. 알고 보니 굉장히 센치한 여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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