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보면 끝이 있겠지요 - ‘29년생 김두리’ 구술생애사] 2화. 어린 이야기꾼

김두리 여사는 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할머니처럼 이름 없이 살아온 모든 여성들의 삶에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역사 연표에 한 줄로 기록된 사건들이 한 여성의 인생에 어떤 ‘현실’로 존재했는지, 그 잔인하고 선명한 리얼리티를 당사자의 육성으로 생생히 전합니다. - 작가 말

내방가사 작품 중 하나인 ‘시골여자 설은 사정’. 1935년 작품으로, 남편을 유학 보내고 홀로 남은 여성 화자의 외로운 마음을 춘하추동 네 계절에 걸쳐 노래했다. ⓒ국립한글박물관
내방가사 작품 중 하나인 ‘시골여자 설은 사정’. 1935년 작품으로, 남편을 유학 보내고 홀로 남은 여성 화자의 외로운 마음을 춘하추동 네 계절에 걸쳐 노래했다. ⓒ국립한글박물관

우리 엄마가 글로 몰라. 국문 글도 몰라. 예전에는 왜 그렇노 하면, 여자들은 글을 몰라도 된다꼬.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친정으로 편지 오고가고 연락만 하면 된다꼬 여자들은 다 글 몰라도 된다, 이라고 살았거든. 요새같이 배아야(배워야) 된다 했으면 더 배았을 거를…….

내보다 두 살 더 무았는(먹은) 친구가 있었어. 즈그 아버지는 일본 가뿌고 없고, 엄마캉 동생들캉 살았거든. 한 해 겨울에 그 집에 댕기메 글을 배았어. 가가(걔가) 국문 쫌 배운다 하니까, 내가 가르쳐돌라 했지.

가가 ‘가갸거겨’ 하는 그거를 한 장 써주더라꼬. 글이 스물여덟 잔강 모르겠다[현재 한글 자모의 수는 스물넉 자]. 그걸 써주데. 그 집에서 저녁에 고걸 익혔다. 우리 친구 하나하고 둘이서 같이 배우고, 그다음에는 집에 와서 또 혼차 배우고.

나갈 여가 없어서 몬 나가면 집에서 배았지. 겨울에 미영(면화) 소구리(소쿠리) 담아서 갈래러(갈러) 가면, 갈래놓고 그 친구캉 둘이서 그걸 읽고. 읽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그 이튿날 그 집에 가서 한 번 더 배우고, 또 집에 와서 읽고. 한 해 겨울에 고래 배았다. 나 연필 핸(한) 자루도 앤 땔겼다(닳게 했다)[그만큼 잠깐 배웠다는 뜻].

그런데 그 이듬해 결혼해가지고, 그때부터는 그거 익히고 배우고 할 여가가 어딨노? 그때는 묵고사는 게 제일 우선이다. 근근이 내 이름자는 쓰고 그랬지. [작가 : 읽을 줄은 아시잖아요.] 요새 느그 글은 내가 잘 몰라. 쌍시옷 해놨는 거 그런 거는 말 잘 못해. 아래웃자를[아래위 글자를] 보고 말로 맞춰서 더등더등 해야 말이 되는 거야. 그때는 ‘어문(언문)’이라 했다. 글 토가 달라.

‘아래 가’[ᄀᆞ] 자라꼬 있제? 고다(거기다) 짝대기를 하나 끄으면 고게 ‘ᄀᆞㅣ’[개]가 되는 거야. 그런 자를 해서 사용을 하는데, 요새는 우에 글자로 갖다가 그거 안 하나?[‘개’라고 쓴다는 뜻] 어는 자가 어는 자다 하는 걸 요량 못하는 거야.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끝에 ‘ᄀᆞ’라는 기 있었다니까. 요새는 끝에 그기[‘아래 아’(ㆍ) 자] 없잖아.

초시(초서 : 필획을 가장 흘려 쓴 서체로서 획의 생략과 연결이 심하다)로 마이 보고 그렇게 배았기 때문에, 초시로 쓰면은, ‘고’ 자를 갖다가 올기맨치로(오리처럼) 이렇게 해서 이래 둘러뿌거든. 느그 보면 모른다.

그때는 두루마리에 가사[조선 초기에 나타난, 시가와 산문 중간 형태의 문학]를 써가지고, 가사라는 거는 숩게 말하자면 글 지았는 거지. 자기 심정 있는 대로 써가지고, 두루마리에 쭉 써놨는 가사집이라고 있어. 그런 것도 얻어다 보고, 내 혼자서 베끼고 붓글씨를 쫌 썼지.

난리판 애인(아닌) 같았으면 다믄(하다못해) 한 이삼 년이라도 배았으면 쫌 나을 끼다. 그럴 낀데, 겨우 한 해, 국문 그거 겨울에 매칠 저녁 댕기며 배았지.

내하고 같이 배았는 그 친구는 글을 하나도 몰라. 그 집에는 또 아(아이)가 있어. 지 동생들. 고는(거기는) 맏딸이야. 나는 동생은 덕암에 있는 느그 할배 하나밖에 없잖아. 내가 밸로 해줄 게 없잖아. 가는(걔는) 밑에 동생이 두 살, 세 살 작은 게 너리너리 있어. 맏이라놨디(맏이가 돼서) 동생들을 업어 키아야 되는 거야. 아(아이) 그거 보느라꼬, 내보다 시간이 더 없는 거야.

같이 저녁에 [글 배우는 집] 가서 외워와서, 그 이튿날 저녁에 내하고 지하고 같이 다시 그 집 간다. 반지(절반)를 딱 갈러가지고 요쪽 편에 하룻저녁 읽고 또 요쪽 편에 하룻저녁 읽고 그라는데, 가는(걔는) 그날 저녁에 요쪽 펜떼기(편) 읽고 나면은 요쪽 머여(먼저) 배았는 거는 다 잊어뿌는 거야.

나는 다 읽었어. 나는 이야기책, 소설로 내가 좋아해. 이야기책 같은 것도 마이 얻어다 보고, 베끼고, 그랬지. 내가 자주 보고 했는 거는 대강 친구들인데도(한테도) 이야기해주고, 엄마한테도 이야기해주고. 슬프고 좋고 이런 거는 이야기해주고.

[작가 : 그때 어떤 이야기 읽었는지 기억나세요?] 여 우리 집에 책 있을 거다. 소설, 심청전하고 춘향전하고 구운몽전 그런 건 내가 대강, 소소한 거 내놓고는(빼놓고는) 이야기해줬어. 화전가[조선시대의 규방가사] 그거는 내 손으로 다 쓰고 베깨고(베끼고), 한 분(번) 두 분 읽고 다 베깨 썼다. 니도 그거 한번 찾아서 읽어봐라. 그게 첩때(처음에) 우리 경주 사람이 지었는 거야. “천하명성 우리 경주.”

내가 친구들 어불래(어울려)가지고 저녁으로 놀면, 내가 화전가 그거를 층층이 앞을 대주면[한 소절씩 먼저 부르며 알려주면] 친구들이 좋다고 야단이다. 내가 춤도 몬 추고 노래도 모하는데 층층이 앞으로 잘 대. 또 효심가라꼬 있어. 그거 앞대주고 하면, 친구들이 좋다고, 즈그 놀면 느그 할매[본인] 오라꼬 야단이다.

또 춘향전 그거 읽으면, 춘향이 매 맞고 할 때, 이르는(읽는) 사람 이르메도 울고, 듣는 사람도 울고. 그래 이야기책 읽어주면, 친구들이 마카(전부) 좋다고 와서 쭈욱 둘러앉아가지고 듣고 노는 거야. 요새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그래 노는 거는 생각을 안 했어.

나제(나중에) 시집가서, 아(아이)들 놓고(낳고) 나서는 비 올 직에 일 없을 직에는 저 소설 같은 거 좀 보고 싶어도, 아(아이)들 있어서 볼 여가도 없고……. 결혼 안 하고 스무 살만 묵도록 놔놨으면 나도 좀 마이 배았을 건데. 내 혼자서 공부를 해도 좀 배았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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