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엔 붕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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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그 처녀들 참 이쁘게 생겼네"라고 말할 사람 손들어보라. 그나마 오래된 명화들의 늘씬한 여자들처럼 “이렇게 팔을 치켜올리면 더 잘 보이죠?”의 자세로 요염 떨고 있는 왼쪽 세 여자들은 그렇다 하고 왼쪽의 두 여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얼굴은 분명 구미호 같은 탈을 쓴 채로 하나는 민망한 포즈로 앉아 있고 서 있는 한 여자는 대체 팔이 어디 붙었는지 가슴은 제대로 달려 있기나 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등 보인 여자의 얼굴은 왜 목을 분질러서 돌려놓은 것처럼 우릴 쳐다보고 있는가? 하긴, 언제 피카소가 우리에게 뭔가를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그림을 그려준 적이 있었던가? 그는 그저 그렸고, 해석은 늘 우리 몫이었다.

아비뇽이란 곳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황청의 치욕적 사건 아비뇽의 유수의 그곳이 아니다. 스페인 제2의 도시로, 우리에겐 황영조를 떠올리게 하는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588쯤 되는 지명이 바로 아비뇽이다. 이쯤 되면 이 아가씨들 직업이 짐작되지 않는가? 당시 평론가는 이 그림을 처음 보고선 “깨진 유리 파편이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 여자들 몸이 온통 쪼개졌다가 다시 붙여놓은 듯하다. 왼쪽에서 두 번째 여자의 시선집중용 침대 시트도 딱딱한 파편처럼 갈갈이 찢어졌다간 다시 적당히 이어놓은 듯하다.

그렇게 실마리를 잡고서 더 그림 속으로 들어가보면 여자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저 조각들은 지금도 미아리에 가면 볼 수 있는 전시용 유리관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피카소 자신이 박박 우기면서 아니야, 난 그냥 그린거야, 라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예리한 눈들은 그 파편들이 분명 여자들을 가두거나, 전시하는 투명한 유리임을 찾아낸다. 왼쪽 귀퉁이의 여와 오른쪽 두 여자들의 얼굴은 가면이다. 그것도 원시 가면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와 옛 이베리아 반도 원시부족들의 가면을 피카소가 그림에 차용한 것이다.

이처럼 험악하고 엉뚱해 보이는 이 그림이 미술사라는 커다란 물줄기를 현대로 이끄는 하나의 출발점이자 분기점이 되었다 한다. 피카소는 서양의 화가들이 목숨처럼 덤벼들던 원근법도, 명암법도, 해부학적인 요소도 다 무시해 버렸다. 이젠 대상을 보이는 대로 혹은 느껴지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대상이 갖고 있던 속성을 상자 펼치듯 다 펼쳐서 혹은 다 잘라내서 평면의 캔버스에 노출시켜 버렸다. 그러니 뒤를 보이고 앉아 있으면 도저히 보일 수 없는 여자의 얼굴이 당당히 앞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눈엔 그녀의 앞 얼굴이 안 보였겠지만 그녀는 원래 그 얼굴을 달고 있었단 소리다. 그것도 가면을 쓴 채, '메롱'하구서.

어쨌거나, 여자들 앞에 놓여 있는 포도송이가 을씨년스럽다. 그 포도송이가 그들 아비뇽의 처녀들의 고단한 저녁식사인지, 아니면 날 잡아 드세요, 라는 굴욕적인 여자들의 이야길 대변하는지는 모르지만, 집단으로 갇혀 있는 창녀들의 파헤쳐진 심경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을 무겁게 한다. 조각조각난 그녀들의 몸, 그리고 원시의 힘으로 상징되는 고도의 성적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갇힌 채 어색한 호객행위의 몸짓을 하고 있는 다섯 여자들에게서 우리는 측은지심을 느낀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그림에는 처녀라곤 없다. 붕어빵에 붕어 없듯, 처녀들의 저녁식사라는 영화에 처녀들로 느껴지는 이가 하나도 없었듯, 그림 속엔 매음굴의 누추한 일상과 피카소라는 힘센 남성의 의도적인 파헤치기만 있다.

미술평론가

※ 이 글은 <지독한 아름다움>(아트북스)에서 소개된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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