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양반이 가부장제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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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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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효재 선생의 팔순을 맞아 후배, 제자, 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선생님의 팔순을 축하하고 있다.▶

조선의 평등한 가족체계가 18세기 이후 가부장제로 변화된 이유는 뭘까? 당시 서구에서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에서의 해방과 사회참여의 참정권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천주교와 실학이 들어와 사회개혁이 이야기되고 민중세력이 성장한 조선 후기에 왜 양반의 가부장제가 전 계층의 여성에 내면화되고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을까.

돈 주고 양반산건 신분차별 수용 한것.

'조선조 사회…'통해 가부장제 가설 제시

팔순을 맞은 여성학계 대모 이이효재 선생이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새로운 가설로 답했다. 당시 서민층이 양반층을 개혁하지 않고 오히려 양반으로 신분상승해 양반의 대표적 문화인 가부장제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서민 여성들은 오히려 가부장제 문화를 내면화해 가족의 신분상승을 뒷받침했다. 서민층이 양반문화를 보편화시켜 신분사회를 양반사회로 변화시킨 시대적 모순을 낳은 것이다.

조선왕조는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사회개혁의 기본정책으로 가부장제 가족제도를 제시했다. 양반관료층을 중심으로 개혁이 진행됐고 가부장제 문화는 양반문화의 상징이자 특권이 됐다. 시집살이 혼인풍속과 부계중심의 조상숭배가 점차 신분세습의 기반을 이뤘다.

하지만 상민층 가족은 경제적 빈곤과 관권의 횡포로 가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여성은 양반의 첩으로, 남성은 양반지주의 비들과 혼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노비는 양반의 소유물로 혼인과 가족관계에서 독립적이지 못했으며 가족적 삶의 기반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이들 신분층에서는 가부장제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유교의 사회명분론과 부자혈통계승의 사상은 양반의 신분을 정당화해주었고 이들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며 사회문화적 특권과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이렇게 가부장제 문화는 양반 지배의 상징이 되었으며 정절과 효부효녀를 표창해 신분질서를 강화했다.

하지만 17세기 외세 침략과 정치권력의 부패로 신분질서는 해체돼 갔다. 서민층은 부패한 관료와 결탁해 비합법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룩할 수 있었다. 효부, 열녀와 정절이 가족 신분상승의 수단이 됐고 상민, 노비층 여성들도 이를 생명보다 중요한 미덕으로 내면화했다. 양반의 미덕을 실천해 양반과 같은 인간대접을 받고자 했다. 결국 서민층은 성차별과 신분차별의 양반 질서를 해체시키기보다 개별적인 신분상승을 택해 오히려 차별의 양반문화를 용납하고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진해에서 한국가족사 연구에 몰두해 온 이이효재 선생은 최근 이같은 가설을 담은 <조선조 사회와 가족-신분상승과 가부장제 문화>(한울출판사)를 발행했다. 그는 지난 14일 그의 팔순을 맞아 한국여성개발원에 모인 후배, 제자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즉석에서 이러한 내용을 발표했다.

책의 맺음말에서 그는 현행 호주제도가 조선조 가부장제 가족에 그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러한 인간차별, 성차별적인 가족문화와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평등하고 열린 가족을 지향할 수 없다고 밝혔다. 더욱이 민주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서열화하는 전통적 문화를 타파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이효재 선생은 “여성주의 평등사회를 요구하면서 가부장제가 우리 사회에 왜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가는 내 맘의 큰 화두, 숙제”였다며 후학들이 자신이 제기한 가설을 비판적으로 연구해서 우리 여성들의 삶과 사회를 깊이 이해할 것을 요구했다.

김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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