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해원진혼굿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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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해원굿에 앞서 무당들과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 시위에 함께 모였다.<사진·민원기 기자>

1990년 여름, 인천의 연수동 굿당에 갑자기 몇 명의 아줌마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또 하나의 문화(또문)' 동인들. 조옥라, 조한혜정, 조형, 장필화들은 노만신(나이든 높은 무당)을 붙들고 부탁했다. 억울하게 살다 죽은 정신대를 위한 진혼굿을 해달라는 것. 노만신은 “주인 없는 굿은 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당시 노만신을 모시던 '새끼무당' 김상순 씨(당시 스물다섯살)는 이를 지켜보다가 신이모들에게 물었다.

“정신대가 뭐야?” “일제시대 때 일본군한테 끌려가서…. 아휴, 넌 어리니까 몰라도 돼.” 그런데 그날 이후로 상순씨의 꿈에 단발머리 어린 여자애들이 자꾸만 나타나서 우는 것이다. 게다가 몸도 많이 아팠다. 시달리던 상순씨는 신어머니와 신이모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결국 노만신은 또문과 함께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큰굿을 열게 되었다. 위안부의 신이 든 노만신은 이렇게 일갈했다. “너희들, 공부만 한 여자들. 우리 원한은 몰라주고 책만 끼고 자빠져 있냐!”

그로부터 13년 후, 상순씨를 비롯해 황해도굿 보존전수회 회원들(노순자, 모상희, 정금녀, 최정애, 이용녀, 김명식, 오수자, 손유희, 김숙자 등)이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해원진혼굿'을 열게 되었다. 이들은 인천 지역에서 꽤 '잘 나가는' 10∼16년차 무당들이다. 대부분 강신무지만 세습무도 있다. 13년 전 굿판에 있었던 사람도 있고 없었던 사람도 있다.

“처음에 우리가 모였을 때, 사적인 상담도 좋지만 사회전체를 위한 대동굿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무속은 사회적인 것이잖아요? 무당은 자기 이름만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진 아픈 곳을 쓰다듬고 치유해주는 사람들이구요. 이것이야말로 무당이 맡은 역할이지요.”

그래서 첫번째 대동굿으로 위안부 해원굿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위안부 진혼으로 결정한 것은 13년 전 또문과 함께 했던 큰굿 때문이다. “그때 다 풀지 못한 한을 이번에는 좀 크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 당시에 큰굿을 해주기로 원혼들과 약속했다. 요즘도 자꾸만 꿈에 보인다”는 것.

여러 무당이 모이고 보니 이중에는 위안부가 뭔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함께 굿을 준비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무당들이 13년 전처럼 단발머리 여자애들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고 이유 없이 아프고 마음이 쫓기는 것처럼 두근거리고…. “이거참, 빨리 진혼굿을 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모두들 서둘렀다. 여름가을내 매일 만나 굿을 준비했다. “이게 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혼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모이게 했다.”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꿈속의 소녀들이 울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아직도 인터넷 등에선 위안부에 대해 논쟁이 많다. 심지어 돈벌러 갔다는 얘기도 나온다. 혼령들은 다들 너무 억울해 한다. 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다. 그 사람들은 국가가 나서서 큰 한풀이를 해주길 원한다.”

드디어 오는 11월 29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동부여성발전센터 대강당에서 해원진혼굿을 올린다. 여성문화예술기획과 또문, 여성신문 등 각종 여성단체의 후원에 힘입었지만 굿에 참여하는 무당들 스스로 모아낸 돈 천만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자리다. 굿구경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려고 밥도 300인분이나 준비한다고 한다.

문의 011-320-9925 김상순

최예정 기자shoooo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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