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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① 아이들에게 어떤 만화를 읽히나

② 추억의 만화가게(2)

③ 내게 힘을 주는 만화

④ 새로운 만화가 오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일본 만화책이 일본 원작자의 이름 그대로 출판되는 일은 없었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한국 만화가의 우수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황미나는 1980년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명실공히 '한국 순정만화의 대모'다. 특히 그의 <굿바이 미스터 블랙>(1984, 재판 서울문화사, 전5권)은 '대모의 대표작'으로 이름 높다.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부터 모티브를 따온 것이 분명한 <…블랙>은 배신과 누명,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정통 로망스다. 세계명작문고를 읽은 소녀라면 뻔히 알고 있을 이 이야기에 그토록 가슴을 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와니'라는 여주인공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미스터 블랙'이 유형지에서 만나 정략결혼한 이 소녀는 실은 대귀족의 사생아다. 원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 인물은 건강하고 낙관적인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스와니는 말괄량이 선머슴이면서 동시에 (캔디와는 달리) 예민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유배가 끝난 후 돌아간 영국에서 출판사에 다니는 현대적인 여성이 되며, 서민 출신의 지식인 청년과 사귀기도 한다. 한편 사교계에 틈입한 블랙이 옛사랑을 만나 감동하고 있을 때, 그녀는 블랙에게 울며 매달리지도, 서민 청년의 품으로 도망치지도 않는다. 대신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린다. 이렇게 쿨하면서도 독립적인 성격은 기존의 여성인물들과 비교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6년에 시작돼 1995년에야 완결된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대원, 전14권)은 모계사회의 신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작품이었다. 아르미안이라는 가상의 고대국가에서 서로 다른 아버지와 성격을 가진 네 왕녀들이 저마다 고난에 찬 여성의 삶을 살아간다. 특히 강대국과 신들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첫째와 넷째의 투쟁은 잊을 수가 없다. 강경옥은 SF와 학원물을 오가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의 <라비헴 폴리스>(1989, 재판 시공사, 전3권)는 주인공이 스스로의 여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끝으로 김영숙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놀라지 마시라! 김영숙은 사람이 아니다. 김영숙은 일본 소녀만화들을 번안 혹은 불법복제할 때 사용하는 필명이었다. 즉 온갖 일본 만화들이 김영숙의 이름으로 베끼고 덧칠하고 이름만 바뀌어서 출판된 것이다. 최근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유랑, 황미리(한때 황미나의 동생이라는 소문도 있었음) 역시 만화공작소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나마 김영숙 '들'은 만화 고르는 안목은 높아서 작품성 있는 일본 만화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바 있다.

최예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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