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단양
안동, 단양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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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통해 '인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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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텅 비었다. 여름 해는 사납다. 나는 안동시내에서 냉면 한 그릇 먹고 도산서원으로 간다. 도산서원은 내 집 같다. 나말고 아무도 없다.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을 무시하고 퇴계 이황 선생의 강의실 마루에 누웠다. 이황 선생은 얼마나 꼬장꼬장했을까? 지금 봐도 도산서원은 산골이다.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을까? 이황 선생은 서울로 유학 가서 일류대를 졸업, 서른넷의 나이에 고시에 떡 붙고 군수, 시장, 장관 등을 지낸 권력자다. 그런 그가 오로지 공부하겠다고 첩첩 산골에 쳐박힌 거다.



같이 구경할래요?



얼마 전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이 마포구 동교동에서 개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황 선생보다는 공부 욕심이 덜해서 혹은 월등히 현대적인 사람이라 산골로 가지 않았다. 부디 김대중 도서관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아 오백 년쯤 뒤에 나 같은 여자애가 관장실에 드러누워 잡생각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한참 땀을 식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난다. 내 또래 남자애가 두리번거린다. 안경을 꼈고 새까맣다. 현판 글씨도 꼼꼼히 보고 뭔가 적기도 한다. 도산서원은 서재나 강당 모두 한 통으로 이어져 있다. 나와 그 남자애는 계속 마주친다. 불편하다. 어색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도산서원 같이 구경하는 거 어때요?”



한의학을 전공하는 스물여덟 경상도 청년이다.



한의학을 전공하다 보니 한문을 꽤 한단다. 현판에 쓰인 글씨들을 자상하게 읽어준다. 전시된 탁본의 뜻을 풀어주기도 한다. 우리는 도산 서원을 구경하고 하회마을로 갔다. 소나무 숲, 마을을 시원하게 안고 흐르는 강, 고택들, 당 나무…. 하룻밤 묵고 가라는 할머니 삐끼 때문에 곤욕스럽긴 했지만 노을이 이쁘게 질 때까지 수다 떨고 돌아다녔다.



안동 시내에 와서 저녁도 함께 먹었다. 그 애가 갑자기 '단양'에 가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다. 우린 단양 가는 막차를 끊었다. 열두 시 넘어서 기차를 탔다. 기찻간에서 캔맥주에 땅콩을 샀다. 들뜨기도 했고 행복했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저는 한의학을, 나는 연극을 전공하게 된 얘기, 식구들 얘기, 옛 애인들에 관한 얘기, 오늘 돌아다닌 얘기를 했다. 내가 먼저 졸았던 것 같다. 우린 어깨를 붙이고 단양 가는 무궁화호 일반석에서 '동침' 했다. 안내방송 소리에 잠이 깼다.



목욕탕에서 빨래하고



“이번 정차하실 역은 원주, 원주.”



원주? 단양을 지나도 한참 지났다. 일단 원주에 내렸다. 새벽 5시, 기차역 근처 목욕탕으로 갔다. 나는 여탕에 그 애는 남탕에. 티셔츠가 땀에 절어 쉰내가 지독하다. 싹싹 빨아 사우나실에 널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축축하다. 어쩔 수 있나, 축축한 팬티에 축축한 티셔츠를 입고 목욕탕에서 나왔다. 하하하! 그 애도 축축한 티셔츠를 입고 나를 기다린다. 어쩜, 참 비슷한 구석이 많다.



원주에서 버스를 타고 단양에 왔다. 충주호의 초록물이 눈을 환하게 한다. 버섯 정식은 담백하고 푸짐하다. 고수동굴은 오싹 할 정도로 시원하다. 단양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서울로 그 애는 경주로 갔다.



오래 안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연락했다. 일상에서 짜증스런 일이 있을 땐 무작정 전화해서 경주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 애도 그랬다. 시험을 망쳤을 때, 새벽에 갑자기 깼을 때, 오토바이를 처음 샀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혼자 감포에 갔을 때 전화했다. 새해가 다가올 무렵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애 어머니가 받는다.



“내 아들 멀리 갔으니 찾지 마세요.”



느낌이 이상하다. 그 애 학교로 연락했다. 그 애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이황 선생이 도산 서원을 만든 덕분에 우린 만났다. 신기한 인연이라 생각했다. 그 애가 죽었다. 사라졌다. 우린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됐다.



경민선 객원기자 dawn29@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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