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자의 K교육 클리닉]
아들 필립 안 커디가 말하는 여성 안수산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맏딸
아시아 여성 최초 미 해군 대위

ⓒ여성신문 DB
미국이 기리는 영웅 안수산. ⓒ여성신문 DB

2021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의 해시태그는 ‘#ChoosetoChallenge(도전을 선택하라)’다.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은 두렵고 불안하지만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감을 갖고 용기를 낼 수 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 안수산(Susan Ahn Cuddy)은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해 용맹한 도전자였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배 안수산의 도전 이야기를 그의 아들 필립 안 커디(Philip Ahn Cuddy)씨에게 들어봤다.

-어머니 안수산은 어떤 분이셨나?

“어머니 안수산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활동적인 삶을 사셨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15년에 태어나서 2015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 젊은이들을 위한 강연을 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한국계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학에 들어갔고 샌디에고 주립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사회학 학위를 위해 아동심리학도 공부했으며 훗날에 출판되지 않은 아동관련 한국책을 몇권 쓰기도 했다. 만능 스포츠 마니아였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미 해군이었고, 뛰어난 명사수였다. 미 해군 정보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일본을 패망시키기 위해 미 해군에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입대 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어린시절 생계를 위해 호두를 까고, 농장일을 하며, 세탁물을 배달하며 외할머니를 보조했다. 중학교 때에는 반장도 하고 공부를 잘하여 유대인 식품점 주인 딸의 과외선생을 하여 집안의 식품비와 바꾸기도 하고 어느 때는 3개월씩 식품비를 면제해주기도 했다. 과외를 받았던 친구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어머니는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대부분의 보수적인 아시안들과 달리 밝은 색과 꽃무늬 옷을 잘 입었다. 외조부모의 한국적인 정신과 서양 기독교 진보정신이 혼합된 사상을 갖고 지독한 인종차별적인 미국사회에서 생존하려는 노력을 다각적으로 했다. 인종차별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제적 부담이 큼에도 불구하고 누나와 나를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보내는 열의를 갖고 있었다. 누나와 나를 위해 학교의 학부모회 활동을 하였고, 모든 스포츠 행사에 참여했다. 은퇴 후에는 가장격이었던 큰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가족의 생계가 달린 중식레스토랑 운영에 오랫동안 올인하셨다. 주 6일을 꼬박 일했다. 그 외에는 도산과 한국 역사관련 사회활동이 전부였다. 3.1여성동지회, 신한민보, 엘에이 YWCA의 ‘걸 리저브(Girl Reserve)’와 ‘투 에잇 클럽(Two Eight Club)’ 등 한국계 미국인 젊은 차세대 멘토 역할을 했다. 수면 중에 돌아가시기 전날인 2015년 6월 23일에도 YWCA 젊은이 모임에서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한국의 역사를 잊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강연을 왕성하게 했다. 흔한 파티나 사교 클럽에는 전혀 나갈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본인이 12세에 아버지 도산과 생이별한 후 만나지 못한 채 살다가 2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나는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는 어머니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2008년에는 UCLA에서 오바마 후보 지지연설도 했다. 오바마에게서 도산 안창호의 정신을 보았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했다.” 

(왼쪽부터)안필영, 안필립, 안수산 삼남매. 사진=미국 의회도서관
(왼쪽부터)안필영, 안필립, 안수산 삼남매. ⓒ미국 의회도서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은 안수산에게 봉건적인 문화 속에서도 어떻게 진취적인 여성이 되도록 교육했나?

“할아버지 부부가 샌프라시스코에 도착하신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노골적이고 극심한 분위기였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주에는 백인혈통 유지를 위해 ‘타인종간의 결혼금지법'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재미 한인사회는 한국의 봉건적인 풍습과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도산 가족의 앞선 생활양식을 지나치게 규제하고 억압했다. 심지어 흥사단 단원들은 안수산에게 스포츠를 하지 말고 머리를 짧게 자르지 말라고 하며, 외국인과 결혼하지 말고 반드시 한국사람과 해야 하고, 대학에 가지 말라고 요구했다. 외할머니에게는 딸을 얌전한 ‘아씨’로 교육시켜야 한다고 종용했다. 여성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도전과 성취였기에 더욱 빛난다.

그러나 이렇게 겹겹이 막힌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벽이 두꺼운 상황에서도 외할머니 이혜련은 맏딸 안수산의 진취적인 삶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야구, 배구, 농구, 필드하키, 배드민턴 등 모든 운동을 섭렵할 정도로 스포츠에 능하였고, 엘에이 시립대학 시절에는 야구부 주장도 맡을 정도였다. 외할머니는 운동 잘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인기 있으므로 인종차별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여 운동을 장려하셨다. 대학에도 진학했다. 어머니의 선택이 옳은 일이면 지지와 격려를 해줬다.”

미국 공공외교 웹사이트에 도산 안창호씨의 장녀가 미국의 영웅이자 선구자로 소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뉴시스
미국 공공외교 웹사이트에 도산 안창호씨의 장녀 안수산이 미국의 영웅이자 선구자로 소개됐다. ⓒ성남시청

-안창호 선생의 부인이자 당신의 외할머니인 이혜련은 어떤 여성이었나?

“외할머니 이혜련은 1902년 기혼부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한국 여성이었다. 남편 안창호를 도와 재미 한인사회의 계몽과 교육에 힘썼고, 1919년 8월 북가주에 흩어져 있던 한인 여성애국단체를 통합하여 ‘3.1대한여성애국구국단’을 창단하여 독립자금 지원에 힘쓴 독립운동가였다. 오롯이 혼자서 조국의 독립의식을 심으며 3남 2녀를 애국자로 양육해낸 강인한 여성이다. 그는 도산의 강한 성격과 육체적인 인내 없이는 그가 한 일은 있을 수 없었고, 한국은 일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도산이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매우 어려운 개척시대였으므로 모두 가난했다. 1930년대 중반이 돼서야 재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혜련은 수년 동안 남의 집의 가사일과 이민 농장 노동자로서, 또 병원에서 일했으며, 집에서 세탁서비스를 운영하며 가계와 독립자금 마련에 힘썼다.그는 남편없이 가족부양을 해야 했으므로 생활력이 강했다. 일의 순서를 판단하는 순발력과 결단력, 리더십과 외교력을 겸비한 탁월한 장부였고, 지도자였다.” 

2015년 3월 10일 LA 카운티 정부는 도산 안창호 순국 기념일을 맞아 도산의 맏딸 안수산 여사의 평생 업적으로 기려 이날을 ‘안수산의 날’(Susan Ahn Cuddy Day)로 선포했다. 이날 LA 카운티 청사에서 열린 선포식에는 안수산 여사와 아들 필립과 딸 크리스틴 그리고 외손자 마이클을 포함해 한인사회에서 3.1여성 동지회, 한국문화회관 등을 포함한 단체 인사들이 참석했다. 사진=안수산 여사 가족 제공
2015년 3월 10일 LA 카운티 정부는 도산 안창호 순국 기념일을 맞아 도산의 맏딸 안수산 여사의 평생 업적으로 기려 이날을 ‘안수산의 날’(Susan Ahn Cuddy Day)로 선포했다. 이날 LA 카운티 청사에서 열린 선포식에는 안수산 여사와 아들 필립과 딸 크리스틴 그리고 외손자 마이클을 포함해 한인사회에서 3.1여성 동지회, 한국문화회관 등을 포함한 단체 인사들이 참석했다. 사진=안수산 여사 가족 제공

-안수산이 미 해군 대위가 된 계기는?

부모님의 나라 조선이 청일전쟁의 쑥대밭이 되고 일본에게 강제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이 제 2차대전에 참전하여 일본과 싸우게 돼 미군에 입대하여 일본과 싸워 이기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여 큰외삼촌 안필립, 막내외삼촌 안필영과 함께 미 군대 입대를 결정했다. 안수산이 5남매 가운데 처음으로 진주만 이후 1942년에 미 해군에 입대했다.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않아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재도전해 끝내 당당히 합격하여 27세에 최초의 동양계 여성 해군이 됐다, 후에 안필립이 1944년에 육군에 입대하고, 1945년에 안필영이 해군에 합류했다. 안수산은 동양인에 여성으로서 인종적 성적 2중적 차별을 받았다. 누구도 그와 일하려 하지 않았고, 귓속말을 하며 눈치를 주고 따돌렸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해군으로서 익혀야 할 모든 기술을 익혔다. 최고의 사격수로서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총을 쏠 줄 알았고, 최고의 훈련기 교관으로 거듭나면서 군대에서 입지를 구축하고 대위로 승진했다. 1942년에서 1947년까지 미 해군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47년부터 1959년까지는 미 해군정보부에서 비밀 정보분석요원로 활약했다. 그는 300여 명의 전문가들을 지휘하는 부서장으로서 많은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했다. 한국전쟁 분석작업을 했으며, 소련사단(Soviet Division)의 최고참으로서 러시아와 배트남에 주안점을 두고 일했다.

미 해군정보부에서 일하면서 남편 프란시스 커디를 만나 결혼을 했으나 ‘타인종간결혼금지법'으로 인해 누나와 내가 태어나고, 내가 5살 될 때까지 버지니아주에서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우리 식구는 엘에이 외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이사했다.”

-안수산의 여권사상은 어떠했나?

“삶 자체가 봉건적인 성차별에 도전하고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의 롤 모델이었다. 군대와 스포츠 등 금녀의 구역을 뚫고 들어가 최고의 자리에서 인정받는 자신만의 삶의 선구자적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 갔다. 해군과 해군정보부에서 승진하면서 확실히 남성들에게 그의 성공을 분명히 보여줬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거의 ‘옳은 방법’이었다. 철통같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던 그의 자신감과 투철한 신념은 ‘옳은 것을 행하라’는 도산 안창호와 어머니 이혜련의 언행일치의 실천적인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긴 결과다. 어떤 것도 그를 막지 못했다. 안수산은 어머니를 보고 강인해지는 법을 배웠다.“ 

-안수산을 ‘미국의 영웅’으로 소개했다.

“2020년 7월 초, 미 국무부가 운영하는 ‘셰어 아메리카'는 공공외교 웹사이트에 ‘미국의 영웅 안수산'을 소개했다. 이 웹사이트는 전 세계에 미국의 외교 정책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법치주의, 종교의 자유, 인간존엄 등 미국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관련된 사례를 소개한다. 안수산의 활약을 높이 사 용감한 장교, 공동체의 지도자, 미국의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안수산은 ‘미국인 용기상'을 한인 최초로 수상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서거일인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했고, 기념식에서 그는 영광스럽다는 말대신 ‘내게는 동양인이건 아니건 그것이 중요치 않다. 나에게 중요한 건 제 2차 대전 중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달’ 지정 선포문에서 “미국에 이민 온 최초의 한국인 부부의 딸인 안수산은 가장 큰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강한 직업윤리, 흔들리지 않는 애국심과 소명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으로 미국에 기여했다”고 극찬했다.“

-안수산의 삶이 어떻게 전해지길 원하나?

“안수산의 도전정신과 자신감은 해군의 명사수 총잡이와 교관으로 성취를 이뤘고, 그의 용기와 절대 진리를 사수하는 신념은 어떤 여자도 가지 않았던 험한 길을 뚫고 들어가 여성에게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성공적인 롤 모델의 사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안수산 이야기를 담은 책 ‘버드나무 그늘 아래’를 한국의 여성들과 소녀들이 읽기를 권한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외할아버지 도산 안창호(1878-1938)는 독립운동의 주요인물이었고, 외할머니 이혜련(1884-1969)은 1902년 기혼부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여성이었다. 큰외삼촌 안필립(1905-1978)은 장남으로서 결혼하지 않고 아버지 부재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고급 중식레스토랑을 운영하였고, 둘째외삼촌 안필선(1912-2001)은 버클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하워드 휴즈 항공사에서 30년간 재직하고 부사장으로 퇴임했고, 루시 안(Lucy Ahn)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이모 안수라(1917-2016)는 남가주대학을 졸업하고 도산선생 서거후 가정경제를 위해 안필립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운영에 참여했고, 막내외삼촌 안필영(1926- )은 체육과 상업수학 교사를 역임했다. 안필립과 두 외삼촌은 할리우드의 배우로 활약했다

나의 엄마 안수산(1915-2015)은 나의 아버지 아일랜드계 프란시스 커디(Francis Xavier Cuddy)와 결혼하여 누나 크리스틴과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미 해군 암호해독가로서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암호해석을 했으며, 해군 국가정보안보국에서 일했다. 다른 백인들과 한인들로부터 많은 인종차별을 겼었지만 모든 한인과 한인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어머니를 지원했다. 누나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1남 1녀를 두었다. 나는 산타바바라 주립대에서 문화인류학과 자연지리학, 수문학을 전공했고, 건축가이고, 전문 서퍼(surfer)이며, 도산가문(Dosan Family)의 역사적 유산 정리와 관리 및 관련 인터뷰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의 영웅’ 안수산
△1915년 1월 16일 캘리포니아 출생 △1940년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주립대(CSU샌디에이고) 졸업 △1942~1946년 미 해군에서 사격 교관과 정보장교로 근무(미 역사상 최초 동양인 여성 해군 장교) △1947년 프랜시스 커디와 결혼, 1남 1녀 △1973년 도산공원 건립 위해 첫 방안△1983년 도산의 유품과 자료 2,500여 점을 독립기념관에 기증 △2003년 전기 <버드나무 그늘 아래> 출간, 출판기념회 및 흥사단 90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한국 방문 △2004년 5월 23일 특별단우로 흥사단 입단 △2006년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가 수여하는 ‘미국용기상’ 수상(한인 최초) △2015년 LA카운티위원회, 도산 선생의 순국일인 3월 10일 ‘안수산의 날’로 선포 △2015년 6월 24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 △2020년 7월 ‘미국의 영웅’으로 미 국무부 ‘셰어 아메리카’에 소개

*필립 안 커디 
도산 안창호의 장녀인 안수산의 아들. UCSB(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에서 문화인류학과 자연지리학·수문학을 전공했다. 건설 현장 감독, 서핑 관련 컨설팅, LA 사마리탄 병원 자문역 등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한국과 미국에서 도산에 관한 연구·기고 활동을 해왔다. “할아버지에 대해 정말 큰 감흥을 받은 건 1987년 천안 독립기념관 개관식에서 할아버지 업적에 대해 설명 듣고 나서였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한국말과 한국역사, 독립운동사를 깊이 공부했다. 90년엔 연세어학당에서 6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역사를 거짓으로 수정하려는 역사왜곡을 저지하는 일, 할아버지 도산 안창호와 어머니 안수산, 그리고 큰 외삼촌 안필립에 관한 책을 내기 위해 한국에 있는 출판사와 작업 중에 있다. 또 서핑(surfing)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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