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페미’의 말 걸기 “페미니즘 나무 너머 숲을 보자”
‘올드 페미’의 말 걸기 “페미니즘 나무 너머 숲을 보자”
  • 이하나 기자
  • 승인 2021.03.06 08:45
  • 수정 2021-03-06 09:3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대하는 페미니즘』 펴낸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2018년 ‘혜화역 집회’서 충격
여성의 요구 정책으로 이어지려면
세대 간 연대와 네트워크 중요
“협상력 가진 여성 연대체는 필요…
차이 인정하되 수평적 소통해야”

 

정현백 전 여가부 장관 ⓒ홍수형 기자
정현백 전 여가부 장관 ⓒ홍수형 기자

“폭발력이 대단했지만 휘발성도 컸다.”

문재인 정부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이른바 ‘혜화역 시위’에 대한 평가다. 혜화역 시위는 2018년 ‘불법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고 디지털성범죄를 처벌할 법 개정을 요구한 집회로 총 6차 집회 동안 36만명의 여성이 참여했다(‘불편한 용기’ 추산). 정 교수는 여가부 장관 재임 당시 혜화역 집회 현장을 찾아 화제를 모았다. 당시 “여가부 장관 해임하라”는 국민청원을 받은 곤욕도 치러야 했다. “여가부 장관으로서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고 절규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찾은 현장에서 그는 “여성인권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송구스럽고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혜화역 시위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규모였어요. 이후 디지털성범죄 문제는 약간 해결했지만 채용 성차별, 성별임금격차 등 성차별 구조의 혁파라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어요. 이제는 (젠더 이슈의) 휘발성이 높다는 것을 정치 권력자들도 알아요.”

당시 “혜화역에서 외친 생생한 목소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정 교수는 최근 펴낸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통해 화답했다. 스스로를 ‘올드 페미’라고 지칭하는 그는 청년 페미니스트들에게 함께 손을 잡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대하는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야 지속가능한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책은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호주제 폐지부터 탈코르셋 운동처럼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 ‘왜 어떤 여성은 더 빈곤할까’, ‘여성을 위한 통일은 가능한가’ 등 우리가 새롭게 던져야 할 페미니즘의 질문까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을 아우른다.

2010년대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면서 일상의 차별을 페미니즘과 연결해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결이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더욱 늘고 세대 간 몰이해도 발생했다. 정 교수는 이 책은 올드 페미가 헬페미니를 향한 ‘말 걸기’라고 표현했다.

“최근 여러 사건을 거치며 여성운동을 해온 우리 세대도 상처를 받았지요. 온힘을 다해 열심히 여성운동을 했지만 폄하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여성운동의 전통과 노하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다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컸어요. 마냥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나 때는 말이야’라고 가르치려드는 ‘꼰대’로 비춰지는 것은 경계했다.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현대사를 다시 읽어주며 ‘연대의 힘’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1931년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대동강 을밀대 지붕에 올라갔던 노동자 강주룡과, 2011년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조선소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한 노동자 김진숙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100년 전 선구적 페미니스트로 살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나혜석과,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준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는 이어져 있다고 했다.

정현백 전 여가부 장관 ⓒ홍수형 기자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홍수형 기자

정 교수는 이민경 작가의 『탈코르셋:도래한 상상』을 언급하며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영페미’ ‘헬페미’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압박과 고통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동시에 현상에 대한 원인을 이해하고 여성 노동권 문제로서 접근하면 문제 해결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도 전했다. 정 교수는 “페미니즘을 ‘나무’ 뿐 아니라 ‘숲’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일각에선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면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여성도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페미니즘은 조금 위험합니다. 문제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현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지금 고위직에 여성이 많나요? 왜 30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야 했는지 법·제도적 문제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여성단체 연대체인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정 장관은 최근 여성단체 대표나 활동가의 정치권 입성을 통해 ‘여성운동이 권력화됐다’는 비판에 대해 “양적인 확대가 질적인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이 늘어난다고 페미니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느냐에 대해선 여전히 것이냐는 물음표가 있어요. 하지만 여성운동가 한 사람이 정치권에 입성해 출세한다는 말은 그동안의 여성운동 역사에서 비춰보면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성추행 고소 사실을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에게 전달한 김영순 전 상임대표를 징계하고, 혁신위원회를 구성해 내부 혁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여성단체연합의 혁신 방향에 대해서는 “국가를 상대로 협상력을 갖는 여성단체 연대체는 필요하다”면서도 “운영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과거의 피라미드식 구조의 운동방식으로는 안 돼요. 개인의 차이는 인정하되 수평적 연대를 갖는 강한 네트워크가 작동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합니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새희 2021-03-12 15:01:38
이번 혜화역 집회로 인한 사람들의 시선과 사건에 대한 집중도도 크게 달라졌지요. 물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포기하지않고 꾸준한 집회와 운동으로 큰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정현백 교수님의 '마냥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네요. 새로운 시대가 오는 걸 기다리기보다 먼저 행동하고 움직이고 목소리를 높여야 새로운 세상으로 바뀐다는 것을요. 교수님의 생각이 저와 같나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