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 인터뷰] 배우 임향화
1970년대 연극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임향화’라는 샛별, 카페 떼아뜨르서 공연
척박했던 미국 이민 생활... ‘역할에 최선 다하는 연극정신’으로 견뎌
‘미나리’ 앞서 이민가정 애환 담은 영화 ‘해피 클리너스’ 주연으로 배우 본능 소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등 최인훈 원작 연극 잇달아 출연하며 6070배우 대열 합류

40년만에 연극계에 컴백한 배우 임향화(70) 씨. ⓒ홍수형 사진기자
40년만에 연극계에 컴백한 배우 임향화(70) 씨. ⓒ홍수형 사진기자

결혼 안 하고 평생 연극만 하며 살리라 생각했다.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성의 ‘바깥’ 생활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다 보니 40년이 흘렀다. 2018년 미국 이민가정의 애환을 다룬 영화 ‘해피 클리너스’ 에 출연하면서 오랫동안 감추고 눌러 왔던 배우 본능을 소환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지난해 최인훈 원작 ‘옛날옛적 훠어이훠이’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무대에 연이어 서며 인생 2막을 활짝 연 배우 임향화 씨를 서울 신사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임향화 씨는 1970년대 연극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서강대 3학년 재학 시절 기성 극단에 스카우트돼 주연을 맡았다. 그는 신여성이던 할머니가 아동극단에 데려가면서 일찌감치 연극에 눈을 떴다. 숙명여고 재학 시절 직접 연극반을 만들어 프랑스 희곡 ‘홍당무’를 번역해 무대에 올렸다. 국내 초연이었다. 고3 때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우연히 본 서강대의 영어 뮤지컬에 매료돼 서강대에 진학했다. 

연극에 있어 그는 당당하고 야심찼다. 대학 2학년 때, 교내 극단에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공연을 위해 연습 중이던 때였다. 그는 ‘애니바디스(Anybodys)’라는 여성 역할을 살펴보곤 다짜고짜 연출 담당 교수를 찾아가 “그 배역,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수는 기존 배우를 빼고 그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그 역할이 주목받으면서 기성 극단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다. 교내 연극반과 ‘가교’, ‘자유극장’ 등 기성 극단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다. 

그의 대표작은 ‘이춘풍전’을 각색한 ‘춘풍의 처’다. 여성 원톱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2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대구 공군기지 장교클럽도 가고, 공주사대 운동장에서도 공연하는 화제의 유랑극단이었다. 그는 영국 회사 한국 지부에서 영어 번역을 해 번 돈으로 지방 공연 가는 기차표를 사곤 했다. 

서양화가 권옥연 씨와 무대의상 디자이너 이병복 씨가 운영하던 명동의 ‘카페 떼아뜨르’에서 살롱 연극을 하던 1975년 당시의 연극 ‘이화 부부 일주일’ 카탈로그 속 임향화 씨. 당시 카페 떼아뜨르에 설 수 있는 배우는 김금지, 김혜자, 박정자 씨 등 걸출한 배우들이었다. 임향화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 무대에 섰다. ⓒ임향화
서양화가 권옥연 씨와 무대의상 디자이너 이병복 씨가 운영하던 명동의 ‘카페 떼아뜨르’에서 살롱 연극을 하던 1975년 당시의 연극 ‘이화 부부 일주일’ 카탈로그 속 임향화 씨. 당시 카페 떼아뜨르에 설 수 있는 배우는 김금지, 김혜자, 박정자 씨 등 걸출한 배우들이었다. 임향화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 무대에 섰다. ⓒ임향화

1976년에는 미국 콜로라도대학에서 조교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유학을 반대했다. 주변의 동료 여성 배우들이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당하는 것도 싫었다. 사방이 조여 오는 상황에서 얼결에 결혼하게 됐다. 1978년, 그는 스물여섯이었다. 식사 때마다 40벌의 수저를 놓아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연극 정신’으로 버텨낸 시집살이와 척박했던 미국 이민 생활

여성의 사회활동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댁에서는 연극 포스터도 못 보게 하고 공연 사진도 모두 버렸다. 멀리서 꽹과리 소리만 들려와도 눈물이 흐르곤 했다. 결혼과 동시에 시아버지 병간호가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연극을 안 했더라면 못 버텼을 거라고 말한다. 

“연극을 하던 정신으로 시집살이도 했던 것 같아요. 워낙 힘들게 연극을 했었기에 시집살이도 참아낼 수 있었어요. 고달파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나는 연극배우고, 이건 지금 내가 맡은 배역이다, 연극배우는 막이 오르면 뛴다,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어요.”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임향화 씨. ⓒ홍수형 사진기자
"연극을 하던 정신으로 시집살이를 했다"고 말하는 임향화 씨. 그는 고달파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나는 연극배우고, 이건 지금 내가 맡은 배역'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홍수형 사진기자

주어진 건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마음가짐이 연극에 전념했던 시절 생겼다고 임향화 씨는 말한다. 세 아이를 낳고, 1994년 미국으로 떠나 아이들을 키우며 뉴욕 맨해튼의 트라이베카 지역에서 한식당을 10년간 운영했다.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식당엔 손님이 연일 줄을 섰다. 메릴 스트립, 기네스 펠트로 같은 셀럽들이 단골이었다. 그러다 2001년, 고작 7블록 떨어진 곳에서 9.11테러가 일어났다. 다시 어려운 시절이 이어졌지만 악착같이 버텼다.

연극에 대한 꿈도 버리진 못했다. 틈나는 대로 첼시·소호 지역의 독립영화관에 혼자 영화를 보러 다녔다.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브로드웨이 연극 대본을 받아 번역도 했다. 뉴욕 생활 중 영화와 연극에 캐스팅됐지만 둘 다 예기치 못한 일로 무산됐다. 그러나 인생의 은 분기점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이민가정 어머니’ 역할, 많은 이들을 울리다 

2017년, 남편의 지병이 악화돼 병간호를 도맡아야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여태까지 잘못 살았습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선 계속 연기에 미련이 있었습니다. 이번 생은 다 내려놓고 순종하겠습니다.’ 그런지 사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미국 이민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를 찍는데 어머니 역할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거였다. 

“40년 만에 연기를 하는데 마치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어요. 그 경험이 순식간에 사람을 바꿔 놓더라고요. 이 나이에도 기회가 다시 생길 수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내가 연기자로서만 살았다면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죠. 인내하며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제 배역이었어요. 제가 걸어온 길도 그때서야 인정하게 됐지요.”

영화 '해피 클리너스(2019)' 스틸컷. 임향화 씨는 한인 이민가정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Korean American Story
영화 '해피 클리너스(2019)' 스틸컷. 임향화 씨는 한인 이민가정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Korean American Story

한인 2세인 줄리안 김과 피터 S.리 감독이 연출한 ‘해피 클리너스’는 2019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로 로튼토마토 지수 100%을 기록했다. 뉴욕 퀸즈의 한인타운 플러싱에서 17년간 세탁소 ‘해피 클리너스’를 운영하는 최씨네를 배경으로 이민자의 설움과 가치관이 다른 부모-자식 간 갈등을 다룬다. 영화를 본 이민 2세대들은 “우리 엄마랑 똑같다, 너무 현실적이다”라며 작품 속 자식들이 아닌 자신이 부모와 화해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촬영을 시작할 때 그는 조연 중 한 명이었는데 찍다 보니 주연이 됐다. 영화는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호주, 네팔 등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2020 아시안아메리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같은 해 한국에서 시사회를 했는데, 연극연출가 윤광진 씨가 보러 왔다가 “저 양반이 지금도 연기할 수 있겠구나” 하며 자신의 연출작 합류를 권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게 2020년 공연한 두 편의 연극, ‘옛날옛적 훠어이훠이’와 ‘달아 달아 밝은 달아’였다. 특히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심청전’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제41회 서울연극제 초청작이다. 임향화 씨는 이 작품에서 눈먼 심청 역을 연기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2020)에서 눈먼 심청 역을 맡은 임향화 씨(중앙)가 다른 배우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  ⓒ공연제작센터
'달아 달아 밝은 달아'(2020)에서 눈먼 심청 역을 맡은 임향화 씨(중앙)가 다른 배우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 ⓒ공연제작센터

“무대에 서기만 하면 기운이 납니다”

60대 후반에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건강의 비결을 물었더니 ‘건강하지 않다’고 했다. 그저 무대에 선다고 하면 기운이 난다고. 

“두 편의 연극도 쉽지 않았어요. 제가 맡은 역할이 백발의 할머니였는데, 등장 동선이 객석 끝에서 무대 쪽으로 걸어오는 거였거든요. 연출가가 저더러 ‘힘드실 테니 무대 옆에서 곧장 등장하시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괜찮다고, 그대로 하겠다고 했어요.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운동이나 관리를 딱히 하지 않거든요.” 

건강 관리 비결을 따로 없다며 웃는 임향화 씨. ⓒ홍수형 사진기자
60대 후반에 무대에서 강렬한 연기를 펼친 김향화 씨는 "건강 관리 비결은 따로 없다.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홍수형 사진기자

“배우로 이름을 떨치겠다는 식의 욕심은 없어요. 무대에 서면 그냥 기쁘고 좋아요. 오랜 시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충실히 감당해온 여성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기회가 오면 좋겠어요.”

임향화 씨는 원하지 않았던 삶을 산다는 생각에 오래 괴로워했지만, 우리 나이 일흔 살이 돼 돌아보니 자신의 삶도 긍정해주고 싶어졌다고. “살면서 해야 할 일 중 많은 것을 해결한 것 같아 홀가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시집살이도, 아이들 키우는 일도 끝났다. “이 나이가 돼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선물 같아 좋아요. 욕심냈다면 조급해졌겠지만, 이제는 편안한 마음이에요.”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자기만족과 자기긍정’ 뿐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그래 이 정도면 잘하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일. 그는 그걸 못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임자학’이었을 정도였다고. 70세에 인생 2막을 펼쳐 든 그는 이제 참고 견디며 자신을 괴롭히는 ‘임자학’이 아니라 솔직하고 당당한 배우 ‘임향화’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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