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
‘일본군이나 정부는 관여하지 않았다’? 모두 사실 아냐
1993년 고노담화도 인정한 사실 무시하고
기존 증거·증언 반영 안해

마크 램지어 교수가 '국제법저널'에 게재한 논문 'ㅇㅇㅇ' ⓒ국제법경제리뷰 홈페이지 갈무리
마크 램지어 교수가 '국제법경제리뷰' 3월호에 게재한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 성매매 계약' ⓒ국제법경제리뷰 홈페이지 갈무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규정한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이 국제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뿐 아니라 국내외 학자와 전문가, 시민단체와 각국 외교부까지 나서서 비판하는 이 논문의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봤다.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은 ‘매춘부’였다?

존 마크 램지어 교수. 사진=하버드 로스쿨 공식 유튜브 영상 캡처
존 마크 램지어 교수. ⓒ하버드 로스쿨 공식 유튜브 영상 캡처

램지어 교수의 핵심 주장은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간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은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그는 논문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매춘업자(brothel owner)'와 '예비 매춘부(potential prostitute)'가 상호 이해관계를 충족하는 계약을 맺었으며, 이를 '게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계약에 따라 매춘 여성은 통상 매춘 계약 기간보다 짧은 1∼2년 단위의 계약을 맺고 고액의 선지급금을 받았으며, 수익을 충분히 올리면 계약 만료 전 자발적으로 떠날 수 있었다는 게 램지어 교수의 설명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램지어 교수가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인용했다고 밝힌 『일본군 위안부 관계자료집성(스즈키 유코 외·2006)』에는 1937년 중국의 군 위안소로 보낼 일본 여성을 모집하면서 제시한 조건 등이 기재된 계약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처우가 전혀 달랐던 식민지 조선 여성들도 같은 취지의 계약서를 썼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식민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화의 오류라는 지적이 나온다. 설사 계약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일본 학자들의 견해다.

역사학연구회, 역사교육자협의회, 역사과학협의회 등 일본의 16개 역사 연구·교육 단체는 2015년 5월25일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역사학회·역사교육자단체의 성명'에서 "성매매의 계약이 있었다고 해도 그 배후에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구조가 존재했기에 관련된 정치·사회적 배경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의 전체상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도 여러 나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감금, 성폭행, 비인간적 학대 사례를 수집해 성노예로 취급한 증거로 규정한 바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2003년 ‘관부재판’에 대한 상고심 판단에서 "위안부제는 나치의 만행에 준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밝히기도 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이처럼 강제 동원과 인권 유린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증거와 증언을 무시했다.

여성들을 속여 강제로 끌고 간 건 민간 업자들이지 일본이 아니다?

1993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의 발표. ⓒMBN 보도분 갈무리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 담화에서 "(위안소의 운영에) 관헌이 직접 가담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하는 장면. ⓒMBN 보도분 갈무리

램지어 교수는 또 “여성들에게 매춘을 강제한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며 “일본군이 사기 치는 (매춘) 모집업자들과 협력한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1990년대 들어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모집을 업자에게 요청하는 등 위안소 설치와 운영에 관여했음을 이미 인정한 바 있다. 1993년 8월4일 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장관은 일명 ‘고노 담화’에서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 옛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했다. 

담화는 또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甘言),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며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의 참혹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일본 정부 내각관방 외정심의실이 발표한 '소위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하여'에는 "위안소의 다수는 민간업자에 의해 경영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경영한 케이스도 있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담은 이 문서는 또 "민간업자가 (위안소를) 경영한 경우에도 일본군이 그 개설을 허가하거나, 시설을 정비하거나 이용시간, 이용요금 및 이용 시 주의사항 등을 정한 위안소 규정을 작성하는 등, 구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및 관리에 직접 관여했다"고 밝혔다.

1938년 3월4일자 일본 육군성 부관통첩인 '군위안소 종업부등 모집에 관한 건'은 중국 파견군이 선정한 업자가 일본 내지에서 유괴와 유사한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앞으로 파견군은 업자를 엄밀히 선정하고 모집 시에는 헌병, 경찰과 긴밀히 협력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위안소 운영에 일본군이 직접 관여했으며, 위안소 내 생활이 강제적이었음을 일본 정부가 인정한 상황에서 "매춘을 강제한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는 램지어 교수 주장은 책임을 민간 업자들에게 전가한 것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설사 업자가 성매매를 강제했다고 해도, 그 배후에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을 일본군은 '공범' 또는 '교사범'으로 봐야 한다. 램지어 교수의 주장은 일본군이 모집업자 선정 등에 깊이 관여한 사실에 눈감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주장 외에도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포함된 내용 중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 기간을 채우거나 빌린 돈을 갚았다고 해서 전쟁터에서 제 발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상당히 많은 돈을 저축해 고향에 부치기도 했다는 주장도 일반화하기 어렵다.

1993년 고노담화 발표 당일 일본 내각관방 외정심의실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는 "위안부들은 전지(전쟁터)에서 언제나 군의 관리하에 군과 함께 행동하도록 되어, 자유도 없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강요당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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