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1932년 황해도 출생 재야운동가
3선 개헌 반대·유신 철폐 운동 등 주도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
통일문제연구소 설립도

사진은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민족사진연구회

한국 민주·민족·민중운동의 원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투병 끝에 15일 영면했다. 향년 89세.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왔다고 알려졌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장련면의 유지로,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 창립 당시 회장을 맡았고 3·1운동 때도 태극기 수천 장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해방 이후 부친 백홍렬이 백 소장을 서울로 데리고 가 김구 선생을 만나게 했고, 그때부터 백 소장은 김구 선생을 따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백 소장은 재야 운동가로 1950년대부터 농민과 빈민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67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으며,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활동에도 참여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면서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은 뒤 옥살이를 했고,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9년에는 'YMCA 위장결혼 사건', 1986년에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진상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5년 뒤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독자 민중후보로 다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백 소장은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지원했다. 백 소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가사의 원작으로 알려진 시 '묏비나리'를 짓기도 했다.

백 소장은 창작활동에도 힘썼는데, '장산곶매 이야기'와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 소설과 수필집을 펴냈다. 그는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미담·현담씨, 아들 일씨가 있다.

백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이며,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15일 새벽 별세한 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있다. ⓒ뉴시스·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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